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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05. 비늘구름 뜨는 오후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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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잘 지내고 있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할머니랑 이모 만나 방방곡곡 여행 다니시느라 정신이 없겠어요. 언니들 만나서 엄마 계시는 곳에 갔더니 안 계시는지 “아이고, 우리 딸내미들 왔나?” 한마디 말이 없더군요. 그래도 우린 섭섭하지 않아요. 엄마가 놀러 갔다고 여기니까요. 엄마, 탁 트인 하늘 보니 속이 시원하지요?

생전에 아들 없어 말도 못 하시고, 울산 이모 묘를 그렇게 부러워하시는 모습에 참, 마음이 무거웠어요. 말로는 한 줌의 재로 만들어 흔적도 없이 새 모이가 되게 뿌려 달라고 하더니, 말씀하셨으면 될 걸 혼자 속앓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가 아주 좋지 않을 때 엄마 갈 곳도 정해 뒀다는 말에 내 집도 마련해 뒀냐며 그리 반갑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비늘구름이 하늘에 가득한 날이면 엄마 생각이 더 나요. 이맘때면 갈치 맛날 때라고 김 서방 제주도 갈 때마다 사 오라 하시더니, 올해는 말이 없네요. 곧 있으면 전어 철인데 엄마가 찾지 않으니 저도 별생각이 없어요. 음식도 같이 먹어줄 사람이 있어야 제맛이 나잖아요? 그 음식도 추억이 되어 버렸어요. 철마다 두릅이며, 응개며, 산초잎 찾으시더니.

엄마,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작년에 혼자 김장을 했잖아요. 사실 엄마가 가신 해에는 김장도 안 하고 그냥 여기저기 얻어먹었어요. 엄마가 옆에서 젓갈 얼마나 넣어라, 고춧가루 그만 넣으라고 훈수를 해주지 않아서 너무 묽어 고춧가루 조금씩 더 넣었더니 또 빡빡하고, 아무튼 맛이 엉망이었어요. 나이가 몇인데 하고 엄마 있었으면 혼나도 싸겠지요.

엄마, 사실 이런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에요. 오해를 풀어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엄마 가시고 큰언니한테 들었어요. 엄마가 요양원 가는 날 “우리 막내가 내 갖다 버리는 갑네.” 하셨다면서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어떻게 내가 엄마를 그러겠어요. 엄마가 아기처럼 되어버렸고 그 사실이 너무 슬퍼 언니와 통화를 할 때마다 울었어요. 엄마가 가엾어서요.

“현진아, 엄마 요양원 보내자. 니가 집에서 꼼작도 못 하고 엄마 옆에 붙어 있다가 니가 우울증 걸리겠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언니들의 말도 그렇고 전문적인 곳에 보내어 보살핌 받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봐요. 사실 엄마가 요양원에서 편한 침대에 있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나흘 만에 그렇게 쉽게 가실 줄은 몰랐어요.

내게 섭섭한 마음이 너무 컸나 봐요.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집에서 막내가 해주는 흰쌀밥에 갈치구이 얹어 더 드시고 가셨을 텐데. 가끔 나 혼자서 고생 더 이상 하지 않고 할머니 곁으로 가셔서 어쩌면 다행이라 위로하다가도 엄마의 그 말이 생각나면 죄인이 된답니다. 엄마가 평소에도 내 말이면 “맞나?” 하셨잖아요. 지금도 그랬으면 참으로 좋겠어요.

참, 엄마. 우리 이사했어요. 우리 집 뒷산이던 윤산이 훤하게 보이는 앞 동네로 이사 왔어요. 엄마가 있었으면 베란다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며 “아이고, 속이 시원하다. 전철이 지나가는 것도 보이네.” 하실 텐데. 가끔 멍하니 전철 지나가는 것을 볼 때면 김 서방이랑 둘이서 엄마이야기 한답니다. 초롱이 산책길에 엄마도 휠체어 타고 아파트 한 바퀴 돌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기만 합니다.

얼마 전에 작은언니 와서 우리 어릴 때 이야기 많이 했어요. 언니 입 돌아갔을 때 생각나죠? 엄마 일 나가고 우리끼리 저녁 준비할 때 언니가
“야, 바람을 부는데 자꾸 옆으로 새 나간다. 이것 봐라.”
“언니야, 니 입이 삐딱한 것 같다. 나는 그리 안 되는데.”
언니는 침을 뱉으면 옆으로 간다고 신기해하며 갸우뚱거렸어요. 우리는 그저 그것이 신기해서 누가 멀리 보내나 침 뱉기 놀이하고, 불 살리기 놀이도 했답니다. 언니의 모습이 우습고 재미있어 나도 따라 하며 신이 나 떠들어댔지요. 언니가 초등학교 3학년, 내가 1학년 때였지요.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들 저녁 하고 있나?”
“엄마, 있다 아이가, 언니 억수로 신기하데이. 침 뱉으면 자꾸 옆으로 간다.”

난 엄마의 소리에 뛰어나가 자랑했지요. 엄마는 언니의 그런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죠.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하얗게 변하더군요. 엄마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우리는 어리둥절하기만 했어요. 언제나 강한 엄마였기에 놀랄 수밖에요. 그때야 알았죠. 큰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요.

그때부터 엄마도 외할머니처럼 새벽바람맞으며 기도했죠. 아직 다들 잠들어 있는 시간 장독대 앞에 서서 무어라 열심히 중얼거리면서요. 흐르는 눈물을 이리저리 훔쳐 가며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생각나요. 평소 미신이라면 두 손을 내젓던 사람이 자식 앞에서는 무엇이든 잡고 매달리게 되는 한없이 약한 엄마이더군요.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요. 엄마가 먹을 것 앞에서 멀리 있는 언니들 생각하면 구박했지요. 그런데 나도 엄마랑 똑같이 되어가고 있어요. 아마 현진이가 나를 보면 내가 엄마한테 한 것처럼 “아이고, 참. 엄마나 맛나게 드셔.”라고 구박 주겠죠. 아무 일도 아닌 걸로 엄마랑 참 많이도 싸웠는데 그렇지요?

딸들은 누구나 자신의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 노력한답니다. 엄마도 할머니한테 갔다 오면 “너거 할매는 와 저러고 사는지 모르겠다.”며 속상해하셨죠. 나도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살 것이라 다짐했어요. 그런데 지금 엄마랑 똑같대요. 뭐 어쩔 수 없죠, 엄마 딸인데.

가시기 얼마 전에 “니는 내 안 보고 싶겠나? 나는 니 보고 싶을 낀데.” 하던 말이 맴돌아도, 유복자 울음소리 저승까지 들린다고 누구든 나 절대 울리면 안 된다고 항상 말해서 저 엄청 씩씩하게 지내고 있어요. 이렇게라도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이 좋아요. 엄마, 잘 지내고 계세요. 여긴 뒤돌아보시지도 마시고요. 우리가 엄마 찾아갈 것이니까요.

엄마, 찬바람 불면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제주도 갈치 튼실한 놈으로 노릇하게 구워 찾아갈게요. 엄마한테 갈 때 식혜와 찰떡만 사 가서 질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잡수시고 싶은 것 있으면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다녀가 주세요. 꼭이요. 오늘도 선선한 바람에 비늘구름이 가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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