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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02. 사랑의 티켓

by BOOKCAST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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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가 들썩인다. 어깨도 덩달아 으쓱거리고 코 평수가 늘어난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성대가 조금씩 열리고 소리가 새어 나온다. 듣기만 하던 노래가 내 목에서 나오고 있다. 잔잔하고 때로는 흥겨운 소리다. 몇 번이고 아는 부분만 흥얼거리며 무한 재생을 하는 고장 난 테이프 같다. 고운 소리는 아니지만 나름 신이 난 소리에 집안 분위기가 밝아진 것은 사실이다. 사실 난 트로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이 운행 중에 신나는 트로트를 틀면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시끄럽다며 구박을 주기도 했다. 그런 내가 요즘엔 트로트에 푹 빠져있다.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에너지가 담겨 있어 나를 끌어올려 주는 느낌이다. 한껏 밝아진 그들의 목소리로 전하는 노래 가사는 추억과 지나온 삶이 밝게 그려져 좋다. 이제야 트로트의 맛이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도 열정은 젊은이들 못지않다. 요즘 중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엔 언제나 젊은 오빠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미스터 트롯>에 나온 가수들이다. 손주뻘이나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이들이지만 우리들의 우상은 언제나 오빠로 불리운다. 그들은 사그라져가는 중년들의 열정과 설렘에 불씨를 살려주고 있다. 노랫말의 의미를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기에 더 끌리는지 모른다.

나이 칠십에 팬클럽에 가입했다는 어르신. 미장원에서 본 그녀의 눈은 반짝거렸고, 목소리는 밝았다. 자식들이 준 용돈의 대부분을 그녀의 젊은 오빠를 위해 사용해도 아깝지 않단다. 아팠던 곳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젊음의 열정이 메워졌다며 적극적이었다. 어느 병원도 자신을 그렇게 용하게 고쳐주지 못했다며 함박 웃었다. 이제 오히려 자식이고 남편이 더 응원을 해준다며 신나 하는 그녀는 10대 소녀처럼 설레 보였다.

얼마 전 일이다. 택배 하나가 내 이름으로 왔다. 요즘 대부분이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전달로 문 앞에 두고 가는 편이다. 그런데 문자로 직접 수령 확인을 해야 한다며 전해 주고 갔다. 얇은 봉투였다. 궁금했다. 평소 워낙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지 않아 받는 택배는 정해진 편이다. 이런 종류의 택배는 처음이라 얼른 수신자를 보았다. 발신인은 유명한 인터넷 티켓 판매처로 적혀 있었고 수신인은 나였다.

봉투를 뜯기가 두려웠다. 언젠가 물건을 무작위로 보낸 뒤 개봉을 했다가 억지 구매를 당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잘 모를 땐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다. 사진을 찍어 가족 단독방에 올렸다.

“벌써 도착했나 보네. 엄빠, 우리가 주관한 깜짝 이벤트에 당첨되었네. 축하해요.”

딸이 전화로 축하를 해주었다. 이벤트 당첨이라니, 어리둥절했다. 아이들이 얼마 전 집에 왔을 때 우리가 텔레비전에 유튜브를 연결해놓고 그 젊은 오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에 둘이서 이벤트를 만들었다며 안심하고 확인해도 된다며 웃었다. 구하기 힘든 콘서트 티켓이 구해져 다행이란다. 남편과 나만을 위한 이벤트라 더 의미 있었다.

 


사랑의 티켓이다. 갱년기 증세로 하루에 몇 번씩 땀범벅이 되고,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처져있던 나에게 보내온 선물이다. 서울까지 가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남편도 기꺼이 하루 월차를 쓰겠노라 한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써야 하고, 함성을 지를 수 없고, 나란히 앉을 수도 없지만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흥분이 되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나만의 우상이었던 오빠를 외치던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시골 고등학교. 라디오로 노래를 듣고 떨리는 화면으로 오빠들의 멋진 모습을 보며 설레었던 시절. 보지도 않을 편지를 쓰고, 연말이면 10대 가수 인기투표 엽서를 보내며 서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최고라 열광했던 우리였다. 우리들은 이미 오빠들의 편으로 나뉘어 신경전을 벌였다. 직접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골 고등학교 시절의 애틋하고 풋풋한 두근거림과는 다른 설렘이었다.

몇 해 전 친구들과 처음으로 콘서트에 갔었다. 우리는 거의 두 시간 공연을 보는 내내 한 번도 자리에 앉지 않고 함께 뛰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학창 시절로 돌아가 있었고, 하나가 되어 오빠를 외쳤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쓰러질 듯 소리를 질렀다. 공연이 끝나고 다리가 욱신거렸다. 다음엔 편한 복장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기로 약속했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을까? 십 대들의 열광보다 중년들의 열광은 굵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소리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다. 일본 중년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기 위해 우리나라까지 온다는 것, 멋진 삶이라 생각한다. 극성도 열정이다.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우상을 보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그들의 몸속엔 많은 엔도르핀이 생성되어 흥분시킬 것이다. 쌓아두었던 삶의 무게를 그들을 보면서 사라지게 한다면 가장 좋은 명약이라 생각한다.

그 자체만으로 식어가는 심장이 다시 뛰지 않을까? 중년의 식어가는 심장은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위로받는 이타적인 사랑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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