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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동경인연>

03. 마지막 기억

by BOOKCAST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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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메모해 둔 종이에서 나는 소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지금 막 깨어났다. 마침내 헌책방 아저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국제전화를 끝으로 아저씨와 마지막 대화가 될 뻔했으나 나는 아저씨와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끝맺을 수는 없었다. 그해 나는 자비로 도쿄도서전에 갔다. 비행기표 예매를 하는 동시에 오치아이의 주인집 아줌마에게 빈방이 있으면 며칠 빌리고 싶다는 내용의 국제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는 반가워하면서(내가 만든 김치를 좋아했다) 내가 살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으니 1층 아들 방을 쓰라고 했다.

마침내 아저씨를 만나러 나카이 역에 내렸다. 아저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역시 말수도 적었지만, 기뻐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들고나온 걸 전해주었다.

그것은 쌀이었다. 쌀.
중학교 졸업 후 가난한 시골에서 도쿄로 취업을 나왔던 아저씨의 고향은 쌀 생산지로 유명하다고 했다. 고향에 있던 동생들이 자신이 먹던 밥 한 공기를 더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그 쌀. 나는 그 쌀 선물을 받고 오치아이 숙소로 돌아와서는 망설였다. 어떻게 하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싣고 돌아가야 할까?

나는 그 쌀이 너무너무 무겁게 여겨졌다. 아저씨의 쌀은 그냥 쌀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춘과 바꾼 무엇이었고, 가족과 떨어져 외톨이가 된 타향살이의 시작이었으며 또한 그 쌀은 앞으로 내 청춘과도 바꿔야 할 그 무엇이었으니까. 세상에 어쩌자고 아저씨는 그런 무시무시한 쌀을 나에게 준 걸까?

내가 좋아하던 아저씨는 노인이 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우리 고향 쌀이야. 아주 유명하지. 가지고 가.”

아저씨는 예전에도 그랬고 그날 밤도 똑같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었다. 여러 형제들 중에 밥숟가락을 줄이기 위해 도쿄로 취업을 나왔던 중학생.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헌책방 일을 마치면 쇼윈도의 흑백 티브이 앞에서 가요방송을 보며 가수의 꿈을 꾸던 소년. 자신의 고향이 무대였던 낚시 만화 시리즈를 빌려주거나 필요도 없는 한국어를 배우며 센세이라고 불러주었던 나의 아저씨.

늘 얻어먹기만 했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저씨에게 저녁을 사드릴 수 있었던 그날, 아저씨는 아주 조금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숟가락을 드는 손이 얼마나 무거워 보였는지 모른다.

이것이 내가 간직하고 있는 헌책방 아저씨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지난가을 도쿄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라고 시작하는 일기장을 열어보는 밤이면 그날의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수화기 저편에서 친구는 말했다.
“있잖아, 너처럼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봐.”

“…”
 
“볼일이 있어서 나카이 역에 가는 길에 헌책방을 지나쳤거든.
셔터가 내려간 헌책방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더라. 아저씨 돌아가셨나 봐.”

나는 친구의 그다음 말은 듣지도 않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친구가 나카이 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헌책방을 지나쳤다는 내용의 장거리 국제전화를 끝으로 나의 헌책방 아저씨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나는 늘 나이 차이가 나는 우정을 동경해왔다. 장 그르니에와 까뮈의 우정을. 헤어져 있어도 서로의 가슴에 별로 빛나는 만남을. 어떤 관계는 대부분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영원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아저씨는 헌책방 안에서 졸고 있다. 가게 문을 두드리는 나. 그럼 아저씨는 눈을 비비다가 점점 미소 짓는다. 발밑에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나는 멋쩍게 머리를 한번 쓸어올린다. 아저씨가 의자에서 일어서면 내가 팔을 벌려 포옹하고. 아저씨는 말한다. 아니 말하려고 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내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시선을 준다.

이런 상상을 병원에 있는 동안 아저씨는 몇 번이고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헌책방 아저씨를. 그리고 그가 그리워했을 이십 대의 나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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