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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동경인연>

02. 오치아이의 방

by BOOKCAST 202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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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하나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이국에서 자신의 몸을 눕힐 방 하나를 가진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것은 까다로운 일본의 부동산 문화 때문이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이사를 가고 싶었던 오치아이의 방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새 계약서를 썼다.
 
나는 4조반의 다다미방을 얻기 위해 선불 월세 2만9천 엔과 보증금 2만9천 엔, 그리고 방을 빌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명목의 ‘레이킹’으로 5만8천 엔을 지불했다. 엔화 환율을 100엔 기준 1000원으로 했을 때 약 120만 원 정도를 가지고 방을 얻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그 방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치아이의 네모난 방 하나가 떠오른다. 다다미 4조반의 공간에 한국에서 가져온 솜이불 한 채가 놓여 있다. 가구라고는 먼저 살던 유학생이 남기고 간 책상과 책꽂이가 전부였고, 그 책꽂이조차 텅 비어 있다. 3단 여행가방에 챙겨 온 코펠로 밥을 짓기 전에 양쪽 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이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창밖에는 가로등까지 있다. 커튼을 대신할 것이 있나 가방을 뒤진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한지가 있다. 창문에 물풀로 한지를 붙여서 장식을 한다. 각각의 창에 노랑, 빨강, 노랑, 연두빛 한지를 마름모꼴로 붙여두자 햇볕이 잘 들오는 날 창문을 열면 노랑과 빨강이 겹쳐지면서 방안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인다.
 
어린왕자의 별에서는 의자를 옮기기만 하면 해지는 노을을 볼 수가 있다지만, 내가 사는 오치아이 별은 창문만 열면 노을이 지는 그런 공간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방에 서서 천장에 달린 전등 줄을 잡아당긴다.
 
덧문을 닫으면 완벽한 어둠 속에 잠들 수 있지만, 나는 그 방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덧문을 닫지 못했다. 한겨울 추위로 이를 덕덕 갈아도. 덧문을 닫지 않으면 나의 방은 별이 되지만, 덧문을 닫는 순간 나의 방은 상자로 변하고, 나의 잠은, 나의 꿈은, 나의 무의식은 영영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별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어서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는 의지의 상징이 바로 덧문이다.
 
나의 오치아이의 방에 불을 끄고 누우면 골목길로 난 창가의 가로등 불빛이 마치 판화에 새겨진 잔물결처럼 솜이불 위로 제 몸을 따라 문신을 그린다. 11월의 찬 기운이 올라오는 다다미방 위에 두꺼운 요를 깔고 목까지 솜이불을 덮은 나는 눈만 깜박이다가 하나둘셋 하고 잠이 든다.
 
꽃 피고 새 우는 이렇게 찬란한 봄밤에 오치아이에서 맞은 첫 번째 겨울을 추억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둘셋 하고 바로 잠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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