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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동경인연>

05. 사진가의 사죄

by BOOKCAST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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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순도 100퍼센트, 무균의 공간에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탐구해보고자 했는데, 막상 도쿄의 오치아이 방에 자리를 잡자, 편의점에서 고른 아이스크림을 코앞에 대고 ‘이것은 나쁜 걸까’ 하고 급히 엔을 환전해 보고는 가격이 비싼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마치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엄마의 수면시간을 빼앗는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피하지 못하던 자기 검열이 바다를 건너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그랬다. 도쿄에서 문화적 자극으로 긴장은 하면서도 대부분 행복했지만, 어째서인지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처럼 한번 죽어본 심정으로 우울한 자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깨알 같은 걱정이 나의 고단한 이마에 새겨졌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솜이불을 덮고 누워도 눈앞의 벽은 촘촘한 그물망이 되어 나의 모든 의식을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 두고 온 엄마와 남동생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유학 같은 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이유만 생기면 짐을 꾸릴 궁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렵게 떠나왔으므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더욱 간절하기도 했다. 집에 갈 날짜를 헤아리며 이제하의 시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일부분을 조용히 암송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우울은 어쩌면 향수병이었을지도 몰랐다.

광화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해서 파고다공원을 지나 종로를 지나 혜화동까지 걸었던 수많은 날들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 그리움의 파도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 바로 등대와 같은 엄마와 남동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어느 날 우체국 아줌마는 세계의 언어를 배우며 여행을 하는 자신의 라보 모임에 초대를 해주었다. 반가운 일이었다. 악어가 나온다는 샤쿠지 공원 이외에는 아직 아무 데도 가보지 못했기에, 일본에 왔어도 일본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기대가 되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일본 유학 가이드북’에는 일본인들은 자신의 집에 초대를 잘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유학 가기 전 엄마는 3단 여행가방에 솜이불 한 채를 챙겨주었고, 양장점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양복 한 벌을 지어주었다. 나는 예를 다해 그 양복을 차려입고 모임에 갔다. 검정 양복이 마치 그날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것처럼 꼭 맞았다.

얼마 전에 ‘성미산 마을 투어’ 통역을 하며 알게 된 것이지만, 그날의 모임은 도쿄의 한 마을 공동체가 추구하는 하나의 메시지였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들은 바로 국제화 사회에 어울리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지 싶었다.

라보 모임은 마을 회관 강당을 빌려서 진행되었는데 간단한 자기소개와 각국에 다녀온 소감을 나눴고, 홈스테이로 머물고 있는 손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레크리에이션을 한 후 소규모 단위로 헤어졌다.

우체국 아줌마가 속해 있는 그룹은 그 그룹을 이끄는 어느 사진가의 3층 집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나는 어른들과 어울리기보다 일본의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게 마음 편했다. 그들의 언어는 단순하고, 언어를 초월한 표정과 몸짓이 한국의 어린이들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우체국 아줌마의 지인으로 참석하게 되었기에 다시 한번 뒤풀이에서 자기소개를 해야만 했다.

이국의 언어를 배울 때 몇 번이고 집에서 연습했던 자기소개를 떠듬떠듬하는 자신을 천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내가 있었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검은 양복을 입고서 말이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투명한 볼에 엄지손가락만큼 커다란 포도가 얼린 채 가득 담겨있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대신 포도알을 입안 가득 물고 젠가를 했는데, 그런 풍경이 몹시 안타까웠다.

뭐랄까 한없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분위기 속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이 백 년 만에 처음 일어난 사건처럼 나도 아이들 곁에 무심하게 웃으며 앉아있고 싶었다. 어서 빨리 자기소개를 마치고 얼린 포도알을 한입 가득 물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낄 수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런 안타까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의 리더격인 사진가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그가 말했다.
“한국 여행을 통해 우리 조상이 지은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신해서 사죄드립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듣고만 있었다. 내 눈앞에서 지난 세월 잔혹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는 사람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자신들의 과거를 부정하고 왜곡하기만 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기사만 접했던 나는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가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그처럼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야 하나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가 또한 이제 막 알게 된 자신의 조상들이 지은 죄를 어떻게든 사죄할 방법을 찾고 있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곁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이들의 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앉은 소파만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준비되지 않은 내가 뱉은 말이라고는 정작 소오데스네.’ 그렇네요라니, 빨리 오치아이 방으로 돌아와서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하루를 노트에 적고만 싶었다.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젊은이에게 6년이란 시간은 가장 화려한 정신의 불꽃 축제 기간이 아닌가 싶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 꺼진 오치아이 방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날의 사진가의 사죄로 인해 나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장래 친구가 된 재일교포 3세 나오미의 손에 이끌려 서울대에서 유학하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서승 선생의 강연장에 가게도 했고, 일본 교수가 잔잔한 어투로 한국은 베트남 참전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죄 했는지 물었을 때조차 감정적이기보다 세계사와 한국사를 끊임없이 조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느끼게 했다.

번역가와 작가 관계로 만나게 된 후지타니 선생의 체험담을 들었던 경험도 인상에 남아 있다. 한국 문학 심포지움에 초대된 후지타니 선생은 모두 한국 작가들 사이에서 일본 대표가 되어 끊임없이 심판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 대표가 되어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있었던 나의 기분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사진가의 사죄를 받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패전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들이 겪었던 혼란이나 죄의식 같은 걸 짐작도 못 했으나 그날 저녁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자 모인 일본 사람들과 사진가의 사죄로 오래도록 마음의 추가 진동되었다.

후지타니 선생 또한 그런 마음의 추가 진동을 멈추지 않아서였는지 문학 심포지움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나중에 한국 심포지엄을 배경으로 단편소설을 써서 문학잡지에 소개했다.

선생님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이상은 사진가에게 사죄를 받은 날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역시 자기만의 역사관을 피력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소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일본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 역사적인 감정은 방석에 깔고 앉은 채 살았는지도 모른다. 혹여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싶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새롭게 안 사실이 있어서 물어보면 대답해 줄 말을 준비하기도 했다. 조금씩 공부해 두었지만, 나서서 화제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일본 사람들은 마을의 역사부터 접근하는 방식을 따랐고, 역사 과목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 과목이어서 관심도 없고 배경지식도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아직도 갑갑한 느낌을 받고 있는데, 그때 후지타니 선생 앞에서 진짜 내가 했어야 할 말이 무엇이었는지, 우체국 아줌마의 친구가 지난 역사에 대해 사죄할 때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했는지 떠올려본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한국음식을 맛보이면서, 한국인이 가진 돌봄, 나눔에 대한 멋을 소개하는 가운데 든 생각은, 일본 친구, 태국 친구, 중국 친구 등이 다양하게 존재할 때 마침내 균형 있는 세계관이 시작되고, 그런 것이 바람직한 지구인의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우체국 아줌마의 초대는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후지타니 선생의 단편 을지로 입구의 푸시킨을 접하면서, 그렇다면 앞으로 한일 관계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이르렀고, 한국판 을지로 입구의 푸시킨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동경인연 구상할 수 있었다. 사진가의 사죄를 받은 그날, 오치아이 방에 돌아와서 일기를 썼는데, 우체국 아줌마와 내가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등장인물들처럼 서로의 세계를 흠모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감상으로 끝을 맺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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