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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32

02. 이츠카가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는 ‘No’다.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고급 델리카트슨의 창가 카운터 석에 레이나와 나란히 앉아 이츠카는 지금 김초밥을 먹고 있다. 냉장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그것은 선득하면서 청결한 맛이 났다. “우선 표를 사야 해.” 델리카트슨 바로 앞이 버스 발착지인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이다. 가이드북에는 당일에도 표를 구매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만석일 때도 있다기에 급한 여행은 아니라 해도 만일을 위해 우선 사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소심하게 느껴졌다. 무계획적인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 “맛있다.” 새 모자를 쓰고 신이 난 레이나가 말했다. 호텔 옆 부티크에서 방금 전에 산 그 수수한 니트 모자(모스그린과 카키색이 섞인)는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의 레이나에게 잘 어울린다. “.. 2022. 1. 17.
01. 가출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국제전화가 걸려 온 시각은 오전 6시 50분. 미우라 신타로는 아직 자고 있었다. “리오나짱이야. 이츠카가 또 뭔 일을 저지른 모양이야.” 흔들어 깨우는 아내한테서 무선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신타로는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쫓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잠에서 깰 때면 늘 두피가 근지럽다. “여보세요.” 쉰 목소리가 나왔다. “신짱?” 여동생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거긴 아침이겠네. 자는데 깨워서 미안. 그런데 이츠카가 없어졌어, 레이나를 데리고.” 이해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없어졌어?” 곁에 서 있던 아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인다. “으응, 아마도.” 여동생의 대답이 왠지 어설프다. “거실에 편지가 놓여 있었어.” 레이나가 썼다는 그 편지를 여동생은 전화기에 대고 소.. 2022.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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