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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다시 쓰는 반려일기>

07. 만약 내가 키우지 않았더라면 강아지가 안 죽었을까?

by BOOKCAST 2022.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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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의 블랙홀
 
만약,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
만약은 가벼우면서 무겁다. 만약은 재미있고 긍정적인 상상이 될 수 있고, 어떤 결과를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핑계를 만들기도 한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신중에 무게를 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온 사건이나 사고에 만약을 붙이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끝없는 자책과 아픔, 하찮은 자존감, 번번이 찾아오는 우울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일이다. 나의 가장 간절한 만약은 여름이의 죽음이었다. 그날의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름이의 사고가 있기 전날, 친구들과 약속을 마치고 늦은 시간 택시를 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택시에 지갑을 흘리고 내린 것을 알게 됐다. 없어진 지갑을 찾고 있을 때 지갑 속 연락처를 보고 택시기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를 내려준 근처에 다시 갈 일이 있는데 지갑을 전해준다고 했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게 되니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개운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고생 크게 안 하고 지갑 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마치 운수 좋은 날 같았다. 지갑을 받으러 가기 위해 세수를 하고 트레이닝복을 챙겨입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자그마한 여름이가 따라다니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밖에 나가고 싶다는 신호였다. 어차피 산책은 시켜줘야 하고, 동네에서 지갑을 받아 간단히 사례금만 전달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여름아! 너도 같이 나가자!”
 
내 말을 알아들은 여름이가 신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여름이에게 조끼형 목줄(가슴에 거는 형태지만, 이해가 쉽도록 목줄이라 하겠다)을 걸어주고 이음새를 확인했다. 팽팽한 감각이 손에 들어왔다. 여름이는 워낙 힘이 넘치고 흥분을 잘하는 타입이라 걷지 않고 항상 뛰곤 했다. 집에서 나설 때마다 목줄을 확인하고 나가는 건 예사였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쫑쫑쫑 뛰어나간 여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강아지처럼 날뛰었다. 핑크색 혓바닥을 날름 보여주며 마치 ‘언니, 나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지갑을 돌려주기로 한 택시기사는 마침 우리 동네 근처에 약속이 있었는지, 동네 주변에 주차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야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양손으로 여름이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빨리 건너고 싶어 네 발을 쉬지 않는 여름이와 나 사이에 ‘으드득’ 소리가 났다. 여름이가 입고 있던 조끼에 달린 목줄의 이음새가 뜯어진 거였다. 살 때만 해도 등산 장비처럼 튼튼해 보였던 조끼는 맥없이 뜯어졌고, 걸리적거리던 구속이 느껴지지 않자 여름이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차도로 뛰어나갔다. 여름이가 뛰쳐나가고 내 손에 남은 건 조끼에서 힘없이 떨어져 나온 고리와 리드줄이었다.
 
15년이나 지난 사고지만, 지금도 나는 눈앞에 여름이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검은 몸과 귀여운 꼬리의 여름이가 저만치 자유롭게 뛰어나간다. 그리고 왼쪽에서 달려오던 주황색 차량은 그대로 여름이를 치고 달려간다. 빨간 불이었으니 그 차가 달려나가는 건 당연했지만, 그렇게 강아지를 치고도 되돌아오지 않은 걸 나중에 생각해 보니 뺑소니 사고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여름이를 따라 차도로 뛰어들었다. 사람이 뛰어들자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멈춰 섰다. 머리를 꽝꽝 울리는 경적이 길게 늘어졌다. 자칫 나도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차에 치여 쓰러진 여름이를 다른 차들이 다시 치고 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차도에 뛰어들어 여름이를 안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지만 대강 알 수 있었다. 들어 올린 여름이의 항문에서 배설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팔다리가 유연하지 않았다.
 
여름이가 죽었구나.’
 
배설물을 흘리는 여름이를 품에 안으니 코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차도 중앙선에 서서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마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겠지만 1년처럼 느껴져 어쩌면 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고 현장에 있던 나의 죄책감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만약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만약 여름이 목줄을 조끼 형태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샀다면?’ ‘애초에 여름이가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에 입양됐다면 오래 살았을까?’
 
수 없는 만약이 매일 새롭게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숱한 만약 중 힘이 되는 만약은 한 개도 없었다. 아무리 만약을 되풀이해도 여름이는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다. 지갑을 잃어버린 나 때문에 여름이가 죽은 것 같았다. 만약은 내 마음을 조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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