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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4

04. 우체국의 마리 아줌마 동화작가의 영혼을 가진 우체국 아줌마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줌마와 나는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편집하는 능력을 즐기기 때문이다. 마치 하루종일 노래하는 새처럼 우리는 서로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다닌다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체국 아줌마는 시간여행자로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마주 본다. 그리고 정해진 대사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말한다. 마치 운명처럼. “80엔입니다.” 우체국 아줌마가 창구에서 국제우편에 도장을 찍으면서 말한다. 내가 동전을 세어서 건네주자 우체국 아줌마가 누구에게 그렇게 편지를 쓰는가 묻는다. “가족과 친구들이요.” 어느 날인가 한국으로 보낼 편지를 들고 오치아이 우체국 창구에 줄을 서 있자 우체.. 2022. 3. 12.
03. 마지막 기억 새벽에 메모해 둔 종이에서 나는 소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지금 막 깨어났다. 마침내 헌책방 아저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국제전화를 끝으로 아저씨와 마지막 대화가 될 뻔했으나 나는 아저씨와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끝맺을 수는 없었다. 그해 나는 자비로 도쿄도서전에 갔다. 비행기표 예매를 하는 동시에 오치아이의 주인집 아줌마에게 빈방이 있으면 며칠 빌리고 싶다는 내용의 국제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는 반가워하면서(내가 만든 김치를 좋아했다) 내가 살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으니 1층 아들 방을 쓰라고 했다. 마침내 아저씨를 만나러 나카이 역에 내렸다. 아저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역시 말수도 적었지만, 기뻐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들고나온 걸 전해주었.. 2022. 3. 11.
02. 오치아이의 방 방 하나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이국에서 자신의 몸을 눕힐 방 하나를 가진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것은 까다로운 일본의 부동산 문화 때문이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이사를 가고 싶었던 오치아이의 방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새 계약서를 썼다. 나는 4조반의 다다미방을 얻기 위해 선불 월세 2만9천 엔과 보증금 2만9천 엔, 그리고 방을 빌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명목의 ‘레이킹’으로 5만8천 엔을 지불했다. 엔화 환율을 100엔 기준 1000원으로 했을 때 약 120만 원 정도를 가지고 방을 얻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그 방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치아이의 네모난 방 하나가 떠오른다. 다다미 4조반의 공간에 한국에서 가져온 솜이불 한 채가 .. 2022. 3. 10.
01.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 헌책방 아저씨는 낡은 다다미방에서 개 한 마리와 생활했다.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헌책방 안은 정리가 안 된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가끔 가격을 물으며 아저씨를 바라볼 때면 장사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책 뒤에 연필로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면 적혀 있지 않은 책도 있었던 걸까. 니혼대학 예술학부 청강생 시험을 통과하고 6개월 만에 어학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서 청강하고 있는 다섯 과목을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고독한 시간.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어판을 서점에서 산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이 책은 시미즈 선생님이 빌려 가서 내가 귀국한 후에야 돌려주었.. 2022.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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