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라클 작전’은
기적이 아니었다
2021년 8월, 한국 외교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이 발생했다. ‘미라클 작전’으로 잘 알려진 아프간 조력자 탈출 작전이다.
8월 15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들이닥친다. 이미 부패하고 무능했던 아프간 정부는 속절없이 항복해버린다. 4월 1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 주둔 미군 철수를 선포한 뒤 넉 달 만이었다. 20년에 걸쳐 진행된 아프간 재건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탈레반은 기다렸다는 듯 미국과 서방 정부에 협력한 자국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을 예고했다. ‘우리를 몰아낸 자들을 도왔다’라는 논리다. 우리 정부도 오랜 기간 아프간 재건 사업을 도왔는데 여기에 협력한 아프간인 수백 명도 신변이 위험해진 상황이었다.
정부는 애초 이런 상황을 예상해 430여 명의 아프간 조력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탈레반의 카불 함락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이뤄지면서 국제공항이 폐쇄되고 정상적인 출국이 어렵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군 수송기를 보내 아프간인 391명을 무사히 구출한다. 이 중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였고 태어난 지 한 살도 안 된 영아도 3명 있었다.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특수 비자를 발급받은 이들은 충북 진천의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전남 여수의 해양경찰교육원에서 자립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순차적으로 지역사회에 정착하고 있다.
‘미라클 작전’? 기자들도 고개 끄덕인 이유
당시 조력자 구출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정도로 많지 않다. 일본은 자위대 항공기를 동원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탈출을 위해서는 일단 조력자들이 공항까지 자력으로 도착해야 했는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탈레반이 카불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시민들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자위대 항공기는 카불 공항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무사히 공항까지 도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한국 외교관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셈이다. 구출에 성공한 뒤 정부는 이것을 ‘미라클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처음엔 촌스럽고 다소 낯간지럽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뒷얘기를 들어보니 ‘기적’이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좀처럼 정부 정책을 칭찬하지 않는 기자들도 이때만큼은 보도자료에 나온 ‘미라클 작전’이라는 네이밍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가장 큰 성공 비결은 사명감이었다. 본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아 카타르로 피신해 있던 대사관 직원 중 일부는 조력자들을 구하기 위해 8월 22일 다시 카불로 들어간다. 김일응 주아프가니스탄 대사관 공사참사관과 경찰청에서 파견 나와 근무 중이던 대사관 경호단장 등 5명이 그들이다. 보통 결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카불 공항은 카오스였다.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공항 밖에선 탈레반이 채찍을 휘두르며 공항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옥행’을 기꺼이 자처한 것이다. 당시 경호팀장은 “나는 아이들도 크고 해서 괜찮다. 들어가겠다”라고 나섰다고 한다. 훗날 김 참사관의 개인사가 알려졌는데 마음이 짠했다. 부인과 사별한 김 참사관은 두 딸이 한국에 있었는데 딸들에게는 ‘미라클 작전’을 숨겼다고 한다.
당시 본부에서 진두지휘하던 최종문 차관, 현장에서 큰 역할을 한 김 참사관과 아프간 대사는 이른바 ‘중동통’이다. 이라크 등 다른 중동 지역에서 오래 근무해 본 경험이 있거나, 관련 부서에서 깊은 지식을 쌓아왔다고 한다. 노련한 외교관들의 눈부신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밀한 전략도 바탕이 됐다. 특히 ‘버스 작전’이 유효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버스 4대를 대절했다. 모이기 쉬운 장소 두 곳을 정해두고 조력자들에게 ‘약속된 시간에 한 번에 탑승하라’고 당부했다. 탈레반은 제대로 된 조직이 아니어서 서로 소통도 안 되었다. 우리 대사관은 미국, 탈레반과 접촉해 조력자들의 여행증명서를 인정하고 공항을 무사통과시켜주기로 모종의 합의를 봤다. 하지만 탈레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버스 탑승을 막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한 대가 탈레반에게 붙잡혀 14∼15시간 동안 고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력자들이 미리 발급받은 여행증명서가 원본이 아니라며 트집을 잡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구타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일응 참사관은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버스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창문 안에서는 밖이 안 보여 밀폐된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버스 안에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는데, 아이들은 울고… … 그게 가장 힘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천신만고 끝에 입성한 공항,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됐다. 당시 김일응 참사관이 한 아프간인을 껴안고 오열하는 사진은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대목을 기자들에게 전하던 김 참사관은 눈시울을 붉히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참사관이 껴안은 대사관 정무과 현지인 직원은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이라고 한다. 김 참사관은 “특히 그 친구 얼굴이 많이 상해 마음이 아팠다”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 공군이 허리를 굽혀 수송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아기들을 살펴보는 모습이다. 우리 군은 아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송기에 분유와 젖병, 기저귀까지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훗날 한 외교부 당국자는 아프간 조력자들이 한국인과 일하며 한국식 업무 스타일에 익숙해진 것이 이번 탈출을 성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조력자들은 아프간에 지어 놓은 한국 병원과 직업 훈련소에서 일하던 유능한 직원과 그 가족들이었다. 수년간 한국인과 일하면서 정서가 많이 닮고, 서로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고 한다.
특히 체계화된 업무 시스템 덕분에 직원들의 연락망이 잘 정리돼 있었고, 그 덕분에 비상 상황에서 신속한 접촉이 가능했다. 즉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메일로 의사소통하는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한국행 의사를 묻고 필요한 서류를 주고받고 여행증명서를 발급받는 등 일련의 과정을 유례없이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고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신뢰를 쌓아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사관 직원들도 카불을 떠나며 “꼭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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