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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01.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by BOOKCAST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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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였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 갔고, 단짝 친구와 매점에서 보름달 빵과 초코 우유를 사 먹었고, 화학 선생님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고, 대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틀에 박힌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드라마에서 보여 주는 그런 조짐은 없었다. 까마귀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등굣길에 검은 고양이를 본 것도 아니었으며, 컵을 깨뜨리지도 않았다. 지독히 평범한 일상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수업이 끝나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다녀왔습니다.”

집 문을 열었을 때 어지러운 집 안에서 먼저 보인 건 곳곳에 붙은 빨간 딱지였다. 빚을 갚지 않았을 때 소유자의 재산에 대한 가압류를 표시하는 빨간 딱지. 그걸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하루아침에 집이 망해 집 안 곳곳에 빨간 딱지를 붙이는 건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닌가. 그런 일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아끼는 피아노에도, 아버지가 선물해 준 카세트테이프에도, 주방에 늘어선 쌀 포대에도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이 물건을 압류합니다. 위 압류 표시를 파기하거나 무효케 하는 자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나는 피아노 건반 덮개에 붙은 딱지를 읽어 보았다. 딱지는 건반 덮개를 여는 부분에 붙어 있어, 덮개를 열면 떨어질 것 같았다.

이 피아노는 이제부터 내 거야. 넌 손댈 수 없어. 그 작은 종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카세트도 마찬가지였다. 테이프를 넣는 곳에 종이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소파에도, 선물 받은 그림에도, 내가 직접 고른 책상에도 어김없이 딱지가 붙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집이 경매에 넘어갔어.”

엉망인 집에 정물처럼 앉아 있던 어머니는 보증을 잘못 섰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보증을 잘못 서서 재산을 크게 잃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보증의 위험성이 잘 알려져서 아무나 함부로 보증을 서 주지 않지만, 그때는 사업을 하다 보면 가족이 아니더라도 서로 보증을 서 주는 일이 흔했다.

우리 집은 가정 형편이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KBS 기자였고, 어머니는 임대업을 했다. 기자의 권력이 강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어디서든 대접 받았다. 아버지는 어디 갈 때마다 내 손을 잡고는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은 어떻게 되는 거지?’ 빨간 딱지가 팔랑거리는 내 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덜컥 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사람은 불행에 빠져야 비로소 자기가 누군지 생각해 보게 된다. 집안 사정도 걱정이었지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조명이 꺼진 기분이었다. 저 끝까지 가로등 불이 켜져 있을 줄 알았는데 골목을 돌아보니 어둠뿐이었다. 지금 성적이라면 안정적으로 목표한 대학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등록금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려면 내가 가고 싶은 대학보다 덜 유명한 곳을 선택해야 했다. 대학에만 가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지금, 꼭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모든 불행 중에서 최대의 불행은 옛날에 행복했던 것이라는데. 신이 내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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