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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02.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이제 시작되었다.

by BOOKCAST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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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넌 잘난 부모님을 닮아야지.’, ‘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잖아.’ 처음엔 칭찬을 받는 게 좋아서, 그다음에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다음에는 잘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아서 열심히 했다. 공부도 잘하면서 부모 속 썩이지 않는 눈치 빠른 아이가 되었다. 어른의 눈을 가진 아이에게는 상처가 보인다. 부모님이 다른 사람에게 나를 자랑할수록, 나는 우쭐하면서도 짓눌렸다. 앞으로도 잘해야 하니까. 나는 그 흔하다는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

그렇게 자라다 보니 마음속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대학에 가는 건 그런 내가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첫 발자국이었다. 그런데 집이 이렇게 된 이상, 대학에 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 같은 성격이었다면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학의 등록금을 벌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든, 과외를 해서 등록금을 대든 이 어려움을 직접 헤쳐 나가려는 의지와 자신감이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카페에서 서빙을 한다거나, 경양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젊은 여자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 전에 세상에 나가 돈을 버는 일은 교육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도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내가 이제까지 스스로 지켜오던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엄격한 가부장제에 푹 젖어 있던 아버지는 심지어 남자가 집에 따라오면 호적에서 파 버릴 거라 엄포를 놓았다.

“남자가 말을 거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남자는 빈틈이 없는 여자에게는 절대 시간도 돈도 쓰지 않아.”
“저는 빈틈 보이는 사람이 아닌데요.”
“남자는 오해를 잘하는 생명체야. 너는 실수로 손수건을 떨어뜨렸을지 몰라도, 뒤에 따라오던 남자는 네가 좋아해서 일부러 떨어뜨렸다고 생각할 수 있어. 소지품 관리도 잘해.”

아버지는 정숙한 여자라면 빨간 구두를 신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사고지만 나는 스스로를 방어할 힘도 용기도 없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당분간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나는 장학금을 주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 결정을 하면서 솔직히 부모님이 미안해하실 줄 알았는데, 그들도 본인 삶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그런 기색도 없었다. ‘내 앞길을 막고서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구나.’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그런 게 다 서운했다.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내게 일에 대한 욕심을, 특히 해외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승무원이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서비스업은 네가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며 반대하셨다.

나는 영어와 일어,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장점을 살려 해외에서 일할 기회가 있는 회사에 취업했다. 기회를 틈타 해외 지사로 나가고 싶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혼자서 나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침 같은 직장을 다니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와의 결혼으로 마침내 나는 중국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내 길고 긴 타국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이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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