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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04. 대개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게으름뱅이보다는 노력가다.

by BOOKCAST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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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사원 때 나는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만큼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많지 않은 덕분이었다. 나는 신입 사원 때부터 공장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재료들이 조합되어 가방도 되고 인형도 되는 것이 퍽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나만큼 공장에 자주 드나드는 사원도 없었다.

한번은 거래처에 제품을 확인하러 갔다. 거래처에는 한국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본 한국인들이 반갑고 믿음직스러웠다. 게다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중년의 아저씨들이었기에, 나는 막연히 그들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어른이니까.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 제품의 품질을 확인하는 자리였기에, 나는 공장 제품 창고에서 랜덤으로 제품 24개가 들어간 포장 박스 하나를 집어 들어 제품을 확인했다. 품질에 특별한 이상이 없기에 거기에 서명을 했다. 내가 골랐다는 표시였다.

Image by rawpixel.com
 

내가 물건을 뜯어보기 직전에, 거래처 직원은 이왕 오셨으니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검사실로 이동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따뜻한 호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을 따라나섰다. 내가 사인한 박스는 다른 직원이 챙겨 사무실로 옮겨 주었다. 밝은 조도의 검사실에서 구석구석 확인한 제품의 품질은 꽤 괜찮았다.

우리는 웃으며 악수로 헤어질 수 있었다. 역시 타국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순진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후에 품질 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직원이 내가 확인한 제품의 최종 검사를 하러 공장에 갔다. 그녀는 검사 결과 제품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 제품 품질이 별로였어요?”
“네. 리젝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품 그대로 거래하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재작업 지시했습니다.”
“그래요? 이상하네요. 제가 분명히 공장에 가서 랜덤으로 한 박스 골라 확인했거든요. 그때는 정말 괜찮은 물건이었어요.”
“혹시 해서 말인데요. 제품 바꿔치기 당한 거 아닐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하던 하청 업체 사장, 그리고 내 뒤에 내가 고른 제품 박스를 검사실에 옮겨 두겠다며 따라오던 그의 직원. 상황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같은 한국 사람이니 거짓말 할 리 없다고 믿었던 나의 실수였다. 그들 눈에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 사원이 속이기 쉬운 먹잇감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때였기에 더욱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박스 바꿔치기를 의심한 바로 그날, 나는 직원들을 데리고 홍콩에서 중국으로 바로 넘어갔다. 내가 사전 예고 없이 나타나자 공장 직원들은 당황했다.

“창고 문 좀 열어 주세요.”
“지금요?”

우리가 공장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한밤이었다. 어두운 창고에 불을 밝히고, 나는 변명을 하며 따라오는 직원을 제치고 박스를 직접 열었다. 박스 안의 제품은 내가 전에 본 그 제품과 완전히 달랐다. 품질 검사에서 나쁜 점수를 받을 만했다. 제품을 들고 돌아선 나는 곤란해하며 눈을 피하는 그 직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시킨 일인지 자발적으로 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에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다음 날 나는 해당 업체에 6개월 거래 중지를 시켰다. 이미 들어간 주문까지만 제작하라고 하고, 추가 주문은 반년간 없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의 강경한 조치에 홍콩 사무실뿐 아니라 중국에 있는 공장에도 말이 돌았다. ‘그 사람 있잖아. 밤에 갑자기 공장에 들이닥쳐서 제품 검사 했대.’, ‘그 직원한테 거짓말 했다가 거래 중지 당했대.’ 그 일로 나는 깐깐한 사람, 적당히 하자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일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는 내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을 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대개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게으름뱅이보다는 노력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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