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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맛있는 맥주 인문학>

07. 맥주와 부부

by BOOKCAST 2020.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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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와 카타리나 폰 보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 동부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평민이었지만 집안 사정이 좋아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과 달리 루터는 아우구스티노회 수사가 되었고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루터는 1513년부터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에서 신학 교수로 일했다. 루터는 이곳에서 면죄부 판매에 반박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는데, 이는 교회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450년경에 만들어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덕분에 루터의 글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루터가 가톨릭의 부패와 교황을 비판하는 글이 멀리 퍼지면서 문제가 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는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 루터를 불러 심문했다. 이때 한 영주가 루터에게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체력을 유지하라는 격려와 함께 아인베크(Einbeck) 지방의 맥주 한 통을 선사했다. 루터는 이 맥주 1리터를 단숨에 마신 다음에 황제 앞에 나섰다. 맥주는 용기를 주었고 루터는 본인의 논리를 마음껏 주장했다.

 

 

루터는 아인베크 지방의 맥주 1리터를 마시고 황제 앞에 나섰다고 한다.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는 1499년 라이프치히 남쪽에 있는 리펜도르프(Liffendorf)에서 가난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6세가 되던 해 브레흐나(Brehna)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거기에서 읽기와 쓰기, 산수, 라틴어를 배웠다. 보라는 10세에 님셴(Nimbschen)에 있는 시토회 수녀원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16세에 종신 서약을 했다. 보라는 루터가 작성한 95개조 반박문을 포함해 가톨릭을 비판하는 글을 읽고 수녀원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보라는 루터에게 탈출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썼다. 루터는 1523년 부활절 밤 수녀 12명을 청어 통 바닥에 숨겨 비텐베르크로 데려온다. 당시에는 수도원을 탈출하다 적발되면 사형에 처해졌기에 목숨을 건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 중 3명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9명은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크에 남았다. 보라는 적극적으로 루터에게 구애하며 결혼하게 된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당시 유럽에서 말 그대로 세기의 이슈였다.

루터는 결혼을 망설였었으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 같다. 루터의 후견인이던 작센 영주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도움으로 비텐베르크대학 내의 수도원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보라는 선제후에게 맥주 공장 허가를 받아 운영하면서 판매도 했다. 루터의 집에는 신앙 상담과 토론을 하러 찾아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는데, 보라가 만든 맥주는 이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선제후 궁정에도 납품할 정도로 우수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루터의 집 지하실에는 그 당시 사용했던 주방 도구와 맥주를 보관했던 통들이 진열되어 있다.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는 맥주를 빚어 손님을 대접하고 생계를 유지했다.

 

 

루터는 맥주를 즐겼는데 주변에도 술을 권하기로 유명했다. 거기에는 루터 나름의 종교적인 이유가 있었다. 맥주를 마시지 않고 깨어 있으면 죄를 짓게 되는데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들면 자는 동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원래 마른 체형이었다는 루터는 맥주를 많이 마셔서인지 말년에는 뚱뚱하고 볼살이 늘어진 모습이다. 맥주 애호가인 루터는 맥주와 와인을 잘 만들던 보라를 무척이나 사랑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보라를 ‘나의 주인 케테(Kathe, 케테는 카타리나의 애칭)’라고 부르고 보라는 루터를 ‘사랑하는 주인’이라고 칭했다. 루터는 결혼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 다음가는 귀한 보물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부부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루터는 보라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실지 기다려봅시다”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1546년 세상을 떠난다. 그때까지 보라는 자녀들과 비텐베르크에 살고 있었다. 얼마 후 페스트가 창궐하자 비텐베르크대학은 이주를 결정했다. 보라는 토르가우(Torgau)로 가던 중 마차 사고를 당해 숨을 거두었다.

500여 년 전 첫 개신교 목사였던 루터와 부인 보라의 삶은 아름다운 드라마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험난했다. 안타깝게도 보라가 루터를 위해 만들었던 맥주 양조법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앞에 설 때 루터에게 용기를 주었던 아인베크 맥주는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많은 사람의 목을 적셔주었고, 1800년대에 미국으로 수출되며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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