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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생각의 보폭>

01. 나는 추상적으로 살고 싶다.

by BOOKCAST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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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생각의 보폭


단순히 그 정도의 일이다. 사전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생각의 보폭을 키운 결과로써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사고 혹은 거기에 동반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고 해도 조금 유리해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또 그럴 수 있었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각의 보폭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당신은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또 한결 넓어진 생각의 보폭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일에서든 인생에서든 그런 장면과 반드시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 자신의 힘만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다면 타인과의 차이를 크게 벌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의 성패를 가른다. 단지 그뿐으로,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야기다. 그리고 어떻게 볼지는 그 사람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구체적인 것이 방해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자신의 입장이 아닌 더 높은 시점에서 내려다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라는 생각도 포함된다. 요컨대 자신을 일단 뒷전으로 미루고 자신의 견해가 아닌 시점(視點)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정말로 중요한 게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 위해 생각의 보폭을 키우는 것이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예컨대 다른 사례에도 도움이 되는 것, 혹은 아무래도 좋은 자질구레한 것을 제외한 대략적인 경향을 말한다. 그리고 대개 아무래도 좋은 자잘한 것은 결국 자신의 입장이거나 타인의 시선(체면), 과거의 경험에 사로잡힌 감정적인 인상 같은 것이다. 이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추상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선명한 시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객관적인 사고법과 추상적인 사고법은 꽤 비슷하다. 실제로 다를 때도 있지만 지향하는 자세는 거의 같다. 객관적이면 저절로 추상적이 되고, 또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면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상론’일지라도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되어버렸다. 이렇듯 추상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하면 대다수 사람은 졸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어서 추상성을 추구하는 감각이 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감각을 되살리는 건 분명 어려운 일로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때때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조금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전개해갈 생각이다. 추상적인 이야기는 고차원의 것이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 순간 돌연 저급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모쪼록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일례로 영토 문제를 들고자 한다. 민감한 부분이지만, 생각의 보폭에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는 이보다 안성맞춤인 화제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섬을 사이에 둔 A와 B라는 국가가 있다. 양국은 그 섬을 서로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한 치의 양보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실제로 이 같은 영토 문제로 몇십 년을 다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 나라의 일이 되면 도저히 물러설 수 없는 사태에 휘말리고 만다.

자, 이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당연히 우리나라의 영토다!’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들은 ‘상대국의 주장을 듣는 건 괜한 짓이다.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면 상대에게 기회를 줄 뿐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끝까지 우리의 땅임을 주장하며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실제로 이 같은 영토 문제로 여러 차례 질문받은 적이 있다. 대학의 내 연구실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도 많았다. 그들은 지도교수인 모리 히로시가 과연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본 적이 없어서 상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언론매체가 떠드는 지식 정도로 도저히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곳이 자국의 영토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대개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국의 영토임을 증명할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가 언론매체가 떠들어대는 것을 덥석 받아들인 것이거나 일방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사고에 의한 주장이라는 것은 책에도 신문에도 없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토 문제는 본디 그런 것일지 모른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생각의 보폭을 키우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써 참고하길 바란다. 먼저, A국에서 그 섬이 B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학자(전문가)를 찾는다. 또 B국에서도 그 섬을 A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학자를 찾는다. 그들 학자는 자국의 국익을 뒷전으로 미루고 사태를 보고 있기에 아마 보통 사람들보다 객관적인 사고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언론매체는 이 사람들의 의견을 결코 세상에 알리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언론도 객관적이지 않다.

양국의 그런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회를 연다. 양국이 ‘이 섬은 당신네 나라의 영토입니다’라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광경을 양국의 국민이 지켜본다.

‘웃기는 소리’라며 웃어넘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카페에서는 자신이 찻값을 지불하겠다며 서로 계산서를 빼앗는 광경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번에는 내게 낼게’라면서. 우리 인간은 상대에게 양보하는 ‘미덕’이라는 것을 안다. 이럴 수 있는 생물은 인간뿐이다. 이 같은 논쟁을 보며 많은 사람이 인간이 얼마나 친절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고 온화한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것은 그저 이상론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이상론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상을 목표로 삼는 것이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의 목적으로, 내 이상이기도 하다. 이상이 나쁠 리 없다. 나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아직 ‘객관적’인 사고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을 일단 잊고서 보다 높은 세계적인 시점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사고법이란 어떤 것일까?

앞서 예로 들었던 두 나라의 영토 문제를 추상화하면, 두 그룹이 어떤 것에 대하여 각기 자신의 소유물(혹은 권리)이라고 주장한다. 양쪽 다 자신의 것임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어떠했는지, 과거에 한차례 차지한 적이 있다든지, 이미 현재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다든지, 지금껏 불평하지 않았다든지, 뭐 그런 것들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본열도가 일본의 국토임을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토지는 있었지만 왜 태어나기 이전의 약속에 구속당하는 것일까?

예컨대 토지의 경계선을 둘러싼 다툼이라면 선조 대대로 있었다. 우리 집 땅이다, 울타리는 어디에 있는가? 왜 울타리를 마음대로 옮겼는가? 이전에는 여기에 있었다…… 이런 식의 언쟁이 오갔다.

약간 추상성이 부족하지만, 이런 경우에 구체적인 것과 거리를 두고서 일반화하는 것이 ‘추상화’이다. 어디에 있는 섬인지, 어느 나라의 영토 문제인지, 일단 잊고서 생각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영토 문제가 아니라 영토 문제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본디 왜 각 그룹의 구성원은 그들이 속한 그룹의 소유물을 늘리려는 것일까? 어느 누가 ‘그건 우리의 것이다’라는 정보를 양산하고 있는가? 나아가 ‘자신의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룹의 소유라면 개인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가? 그저 감정적으로 생각했던 문제를 이렇듯 차츰 추상화해감으로써 냉정히 바라보게 된다.

추상화함으로써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전혀 다른 문제에 적용할 수도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국경’이나 ‘경계선’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이 같은 정의나 언어적인 의미에 이르기도 한다. 경계라는 건 수학적으로는 굵기가 없는 선(線)인데, 현실적으로 굵기가 없는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육지에 국경이 있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국경을 ‘이 부근’ 정도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 본디 땅은 불변이 아니다. 지각 변동에 의해 대륙도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경선이라는 건 굵기가 1km쯤 되어도 좋은 게 아닐까. 세계 지도에 그려진 선은 충분히 그 정도의 굵기다. 그 국경선 위는 어느 쪽 국가의 것도 아니다, 혹은 양국 모두의 것이라고 양국이 결정하는 건 어떨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라며 화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조금 차분히 그리고 유연히 생각하는 태도는 양국에 있어 불리할 게 없다. 점차 국경선의 굵기를 확대해가면 ‘국가’라는 걸 그만두자는 주장을 내놓는 세계적인 정치가가 등장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인류의 미래는 조금 밝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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