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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생각의 보폭>

08. 발상을 키우는 6가지 방법?

by BOOKCAST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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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상적인 것을 의심한다.

평소에 태연히 해오던 것들을 의심한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 간과해온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기던 것에 ‘왜?’라고 묻는 것이다. 자주 ‘상식을 의심하라’는 말을 듣는 데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건 없다. 일상적으로 ‘어, 이상하지 않아?’라는 눈으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바라보는 자세다. 이것은 트집을 잡는 것도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오해를 받기 일쑤라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도 충분하다(하지만 주변 사람에게 묻고 상대의 반응을 보는 건 공부가 될 것이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은 빨갛게 혹은 노랗게 물든다. 그런데 잎사귀는 왜 색을 바꿔야만 할까? 자연계의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목적을 가진다. 그러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으로 자연도태에 의해서 그 종이 생존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잎을 떨어뜨리는(낙엽) 게 겨울바람이나 적설에 유리하다. 나뭇잎의 색깔이 초록인 채로 있으면 어떤 나쁜 일이 있는 것일까?


2. 평소의 것을 조금씩 바꿔본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참 할 일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 말처럼 이런 생각들은 분명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다급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상은 무엇이든 좋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라도 좋고 상관없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라도 좋다. 그것에 대하여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대로는 너무도 막연해 무엇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모를 것이다. 따라서 그 일부를 조금 다르게 본다. ‘만일 ~였다면’이라는 식으로 가정한 뒤에 어떻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때의 ‘만일’은 전혀 일어날 리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도 좋다. 예컨대 ‘만일 인간이 물속에 사는 동물이었다면 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공의 세계에 ‘국경은 있을까? 국가는 있을까? 어떤 산업이 있을까?’라고 점차 상상을 부풀린다.


3. 비슷한 상황이 또 없을까?

일상에서 ‘과연 그렇구나!’ 하는 일은 다소의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가져온다. 그리고 ‘아,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탄복하는 일은 작은 기쁨을 선사한다. 이런 경험이 켜켜이 쌓여 그 사람의 지성이 된다. 늘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달음으로써 지성은 점차 성장하고 또 늘 수정된다. 인생의 가치는 이 같은 변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읽는 등 직접 타인의 지성을 접하는 것은 물론, 홀로 어떤 작업에 몰두해 있어도 반드시 발견이 있다. 작은 것이라도 좋다. 그 발견을 간과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4. 비유할 수 있는 것을 연상한다.

단순화시킨 것을 다른 것에 비유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도 꽤 유효하다. 이것은 구체적인 방법에 가까워서 실천하기도 쉽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이런 식의 비유가 많다.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이나 ‘느린 숲처럼’이라는 표현은 간단히 떠올릴 수 없는 뛰어난 비유다.

따라서 ‘나비 같은 꽃잎’이라는 수준의 비유는 낙제감이다. 좀 더 먼 다른 분야의 것과 관련지어 연상해야 한다. 들은 사람이 ‘어?’라고 한순간 의외성을 느끼지만, 곧 ‘아아, 왠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한계선에 있는 게 가장 좋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려고 떠올린 게 아니니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도 상관없다. 스스로 이거 꽤 괜찮지 않아?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5. 창조적인 것을 접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봐도 또 시를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상쾌하고 좋은 기분이 될 수는 있지만 실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오히려 돈이 든다). 만일 대상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감성’이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없다면 정말로 무용지물이 된다.

감성에 의해 말로 할 수 없는 것, 구체적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좋은지 혹은 나쁜지를 판단하고, 게다가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이 ‘즐거운’ 상태가 추상적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즐거운 것은 ‘웃는’ 것이라고도 간단히 말할 수 없다. 즐거워 눈물을 흘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6. 스스로 창작해본다.

감성으로 체험하는 것은 ‘해석’이나 ‘이해’가 아니다. 결국 느낀 것을 언어화하는 것은 느낌의 일부만을 구체화한 것으로 전체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것은 그림이나 음악이라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언어에 의해 창작된 시나 소설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표현돼 있어도 그것을 언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른바 평론가는 이런 일을 무리해서 한다. 잘못이라고 해도 그것을 원하는 일반 대중은 꽤 있다. 뭐든 좋으니 구체적인 해석이나 이해를 원한다. ‘모르는 것보다 낫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수요는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낫다. 추상적으로 대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에 의지한다. 모르는 채로 둘 수 없는 것은, 그것만으로 사고력이 쇠약해지고 단순화시키지 않으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알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사고정지라는 안정된 상태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이미 죽어 있는’ 상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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