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릿속에 자신만의 정원을 만든다.
이것이 추상적인 사고와 일맥상통하는 구체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머리, 재미있는 발상, 새로운 발견을 낳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장소’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사고공간을 관찰하고 둘러보고 구체적인 잡초를 발견하면 꼽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씨앗을 뿌리고 꾸준히 살핌으로써 점차 그리고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정원’일까?
머릿속에 만든 장소이니 돔구장도 좋고 고층 빌딩도 피라미드도 좋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인공적’인 것이다. 사실 ‘논리’도 인공적인 것으로 계산도 추론도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이 생각한 대로 된다. 결국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두뇌는 ‘자연’이지 인공물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발상’은 그런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머릿속에 있는 개인적인 것, 비교적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자연’이기에 결국 ‘정원’이다.
이것이 이 책을 쓰는 동안에 내가 떠올린 가장 가치 있는 발상이다. 결국 뛰어난 발상이라는 것은 자연에서 나온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머리가 낳은 인공의 논리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인간의 머리라는 자연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원 일이나 농사처럼 추상적 사고의 밭을 경작하고 거기에 씨앗을 뿌리는 수밖에 없다. 발상이란 그렇게 하여 수확하는 것이다.
정원 일에서 떠올린 것이지만 추상적인 사고가 이뤄지는 장소는 나의 ‘정원’ 같다. 이미 우리는 각자 사고공간으로서 정원을 가지고 있다. 그곳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가꿀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외부의 영향에 예민하고 날씨에도 크게 좌우된다. 그곳에서 자란 어느 나무가 지나치게 성장하여 햇빛을 가려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해충도 있을 테고 식물을 약하게 만드는 병도 있을 것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곧 온통 잡초가 자라서 정원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미 우울해져 결국에는 생각하는 게 성가신 머리가 되어버린다.
‘어떻게든 배우자’고 생각해도 단기간에 아름다운 정원과 같은 ‘생각하는 장소’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만일 가능했다고 해도 조금만 방심해도 다시 황폐해져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꽤 고생하게 된다.
예컨대 ‘역전의 발상’ 같은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했다고 하여 그런 사고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이런 구체적인 방법을 수없이 도입해도 그것은 그때뿐이다. 결국 전문 정원사가 만들어준 정원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기에 차츰 아이디어는 시들고 토양은 야윈다. 매일 꾸준히 잡초를 뽑는(추상적으로 생각한다) 정원에는 당해낼 수 없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두뇌를 돌보지 않으면 새로운 발상, 뛰어난 아이디어를 낳는 토양은 만들 수 없고 유지조차도 어렵다.
스스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분 좋은 정원’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결국 ‘발상력’의 실체가 아닐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매일매일 ‘이런 게 아니야’ ‘저런 게 아니야’라며 꾸준히 탐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것을 교육에 살릴 수 없을까?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식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교육을 개선하기 위하여 최근에는 ‘시각적’ ‘체험적’ ‘종합적’이라는 키워드로 커리큘럼을 짜고 있다. 아마도 그런 교재를 팔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온 것임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의 상상력은 키워졌을까? 예컨대 수학 수준은 높아졌을까?
만들기 체험을 통해 아이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만들기에 대한 즐거움을 일깨워준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 교육현장을 보면 단순한 키트를 조립하는 정도다. 실험이라고 해도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고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는다.
자주적으로 조사하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수업도 유행하는데, 내 눈에는 그저 아이들에게 어른 흉내를 시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을 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기에 정보처리능력은 옛날에 비하면 월등히 향상되었다. 그러나 정보처리는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다. 아이들은 그것을 오해하고 있다. 책에 나온 내용이나 인터넷으로 검색한 것을 복사하는 걸 ‘이해’라고 여긴다. 그런 정보에 접촉할 수 있는 게 ‘똑똑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나도 그 방법은 모른다. 또 그런 방법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옛날처럼 무턱대고 어려운 계산이나 응용문제를 풀이하는 훈련은 적어도 두뇌 운동이 될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수(數)라는 걸 머릿속에 이미지하고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날 불현듯이 추상적인 것이 떠오른다. 하기 싫은 공부를 꾹 참고하는 가운데 자기 나름의 ‘생각하는 방법’이 싹튼다. 처음에는 귀찮아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잡초를 뽑았는데 작업하는 가운데 자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정원으로 변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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