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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다시 쓰는 반려일기>

10. 펫로스 증후군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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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펫로스를 지켜보는 마음
 
보기 좋은 풍경은 계속될 것 같았다. 인생의 호시절은 어쩐지 영원할 것 같고, 호시절의 끝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11살 별이는 13살이 됐고 매일 심장약을 먹었으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으면 병원에서 케어를 받으며 지냈다. 견주 입장에선 아픈 강아지를 노심초사 바라보면서도 하루라도 더 살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시기였으리라. 그러나 산책을 잘 다녀온 어느 저녁부터 별이는 숨이 가빠지기 시작해 이틀 만에 무지개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15년 전 아득하게 강아지를 떠나보낸 내가 가까운 곳에서 타인의 펫로스를 지켜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치 슬픔이 전염되듯 동생의 소식에 덩달아 가슴팍이 조여왔다. 직접 별이를 키운 적이 없는데도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상실감이 밀려왔다. 모카를 키우며 잊었던 이별의 아픔이 지인의 펫로스 소식에 다시 상기된 듯 온몸이 떨려왔다.
 
차마 전화를 하기엔 상황을 종잡을 수 없어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다. 동생은 마음 추스르면 다시 연락을 준다고 답장을 보내 왔다. 내가 경험한 15년 치의 슬픔을 동생은 어떤 모양과 시간으로 보내게 될까. 눅눅한 마음은 쉬이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보다 빨리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만간 한 번 놀러 오기로 했던 동생이 날짜를 좀 더 당기자고 했다. 별이를 잃고 당분간 만나기 어려울 줄 알았건만. 날짜를 당겨 그 주말에 동생 내외가 우리 집에 방문했다. 동생 내외는 웃는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그렇게 만나 식사를 하면서도 조심스러워 안부를 제대로 묻지 못하고 허둥댄 건 나였다.
 
‘괜히 물어봤다가 눈물이라도 터지면 미안해서 어쩌나.’
‘그래도 큰일을 겪었으니 안 물어보고 넘어갈 순 없는데 언제 물어보지.’
참아왔던 질문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겨우 꺼내볼 수 있었다.
“별이가 떠났는데, 남은 둥희는 괜찮아?”
 
둘째였던 둥희에게 별이는 체구만 작은 ‘언니’였다. 함께 산다고 반드시 살갑게 지낼 필요는 없지만 난 자리는 모를 수 없는 것. 아직 별이가 떠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둥희는 별이가 병원에 간 정도로 알고 있다고 했다.
 
“언니, 나는 별이 떠나보내고 다음 날 바로 별이 물건 전부 치웠어. 별이 물건만 보면 울것 같은데 내가 우울해 하면 둥희도 우울할까 봐. 가끔 울컥하지만 잘 참아내고 있어.”
 
이 말을 하면서 동생은 눈물을 반짝 비쳤다. 원래 약속했던 날짜보다 앞당겨 우리 집에 온 것도 펫로스 증후군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 이별이 짐작되는 반려동물을 키울 때 준비하면 좋은 점들도 이야기해줬다. 별이는 3kg대 작은 강아지라 어느 장례식장에서든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별이의 장례를 치른 곳에서는 5kg 이하인 동물만 가능하다고 했다. 규격화된 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5kg이 넘는 모카나 좀 더 큰 중·대형견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질 무렵 이용 가능한 장례식장을 최대한 알아보는 게 좋다고 했다. 또 장례식장마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달라서 유골을 담아주는 방식, 비용이 제각각이란다.
 
동생은 별이의 건강이 부쩍 나빠지면서 장례식장을 알아봤다고 했다. 예고 없이 여름이와 이별한 나는 그럴 겨를이 없었지만,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면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동생은 SNS에 별이와 둥희의 일상을 줄곧 기록해왔는데, 별이를 떠나보낸 후 SNS가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예전에 키운 강아지는 핸드폰에 저장한 사진이 전부였고, 핸드폰을 바꾸면 그마저도 덜 보게 되잖아. 그게 내내 아쉬웠는데 SNS는 기록하고 편하게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그동안 별이 사진을 많이 남겨놔서 다행이야.”
 
반려동물을 키운 이상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펫로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동생은 한동안 준비운동을 해온 듯했다. 모카를 키우기 전 내게 조언했듯 키우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해준 덕에 무너지지 않았던 동생의 안부는 그렇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같은 아픔을 정도의 시간 차이만 두고 똑같이 겪게 될 반려인으로서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감히 잊으라고 말할 수 없고, 시간이 얼마쯤 지난다고 괜찮아질 수도 없는 거대한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곁의 반려인들 아닐는지.
 
만약 주변에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사람이 있다면 괜찮아질 거라며, 시간이 약이라며 망각을 부추기지 말고 기다려주자. 먼저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은 결코 잊을 수도, 괜찮아질 수도 없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이 줄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이 무뎌지고 일상의 일부가 되어 기억 속 소중한 존재로 남게 될 뿐이다. 그래서 떠난 동물의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 대신 추억이 떠오르도록 응원하고 기다려주는 게 곁의 반려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믿는다. 반려인들 사이에 무언으로 맺은 연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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