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盈,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영, 음성상화, 전후상수, 항야.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악하다는 생각 때문이고,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하는 것은 불선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유와 무는 서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 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형성시켜 주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채워 주며, 악기 소리와 목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무위의 자세로 일을 하며,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잘 자라게 하되 그것을 자신이 시작했다고 하지 않고, 잘 살게 해 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일을 하되 그것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오로지 공을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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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절대적 권위나 불변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이나 착함도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높고 낮음이나 길고 짧음도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만물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두고 변화를 인위적으로 추동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그러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공이 생기더라도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거나 티 내는 법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가 만약 교사라면, 지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지시적인 교육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적인 깨우침이나 창의적인 발상을 유도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식도 상대적이라는 전제 아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실험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무위자연의 교육 방법’을 시행했을 것이다. 슬기로운 교사는 지나치게 복잡한 교안을 짜지 않고 학생들이 저절로 공부하고 깨달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애정의 눈길로 말없이 지켜보는 성숙한 조력자이지 않을까.
《노자이야기》를 쓰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삶이 그러했던 것 같다. 김삼웅 선생이 쓴 《장일순 평전》(두레, 2019)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편하고 꾸밈없는 옷차림처럼 무위당의 말씀은 편하고 쉽고 단순했지만 넉넉하고 명쾌하고 깊었습니다. 넓고 깊은 데다 소탈한 표정과 자애로운 웃음을 곁들인 천의무봉(天衣無縫)이었지요. 무엇보다 말씀을 나누고 사람을 만나는 데 차별이 없으셨습니다. 고위 인사에서 거리 행상에 이르는 누구에게나 늘 너그럽고 다정하셨습니다.
온 생명을 모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도 모시고 아래도 모시고 좌도 우도 섬기셨습니다. 당신 생애의 하루하루와 매시간을 아낌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공생(共生)의 삶을 사신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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