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과 음악은 다른 것일까, 그럼 수학과 미술은?”
“끝없이 계속되는,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같은 것에 대한 감각의 차이, 감성의 차이, 인식의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 질문들은 이번 숲으로의 여행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핵심적인 과제들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생각은 누구나 한다. 그것도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의지가 있든 없든 계속되는 것이 생각이다. 심지어는 자면서도 생각은 계속된다. 잠에서는 오히려 현실의 경계까지 허물며 생각이 더 확장된다. 왜 그럴까? 그리고 이 멈출 수 없는 생각이 멈추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이런 많은 생각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특히 생각에 관해 면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성인이 되었거나, 창조적인 아이디어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여행이 더 없이 행복한 여정이 될 것이다.
생각에 대한 여행에 앞서 먼저 새롭게 정의하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안다(Knowing)’는 것과 ‘이해한다(Understanding)’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안다’는 것은 지금 독자의 머릿속 그대로의 생각이 옳은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자기 것처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는 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것’처럼 이성 속의 시냅스를 따라 저 먼 저장소에 가둬진 기억의 일부가 되어서는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창조적 생각’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창조적 생각’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폭풍처럼 솟아오르는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또 다른 두 가지를 같이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오감’과 ‘감성’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은 이렇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오감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이 오감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평등하면 좋겠지만,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사과를 상상해 보자. 이 사과의 색과 크기, 상상할 수 있는 맛과 향, 심지어는 손에서의 촉감과 씹어 넘길 때의 느낌, 과즙이 입 안에 퍼질 때의 기분, 이런 것들이 사람마다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모든 사람의 오감이 같았다면 창조의 세계는 현미경으로도 보기 어려울 만큼 작았을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세계는 모두가 가진 ‘감성’이라는 해석의 통로를 거쳐 ‘이성’에 전달된다. “아, 저 푸른색이 가진 신 맛. 그 맛은 약간 떫으면서도 입안에 가득 퍼지는 아삭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지.” 이처럼 ‘감성’으로 해석된 신호는 다시 ‘이성’에 전해져 이 사과에 대한 논리적 추론과 명령을 이끌어낸다. “저 푸른 사과는 더 이상 쳐다볼 가치가 없어. 이제 그만 가던 길을 가자.”
그런데 같은 사람일지라도 오감에 개입하는 감성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질 수 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때로는 시원해 보일 수도 있고, 우울할 때는 자신의 마음속에 흘러내리는 눈물로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오감이 인지하는 세계가 매번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매번 같은 것을 인지할 때마다 항상 같은 해석을 내리는 감성을 또한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사실 우리는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매일 앉아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책상 위에서 작은 메모리 스틱이나 클립 하나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기억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누군가 “노트 옆에 있다.”고 가르쳐주고 지나갈 때, 이걸 왜 보지 못했는지 자신의 눈을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가?
셋째는 생각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으로 사고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언어와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 꿈을 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두 가지가 아니면 사고는 불가능하다. 물론 소통의 수단도 이 두 가지다. 텔레비전은 어떤가? 움직이는 이미지든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든, 이차원적인 이미지든 삼차원적인 이미지든, 이미지는 텔레비전의 핵심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소리를 가진 것이든, 소리를 가지지 못한 문자든 모두 언어다. 이 둘의 조합이 텔레비전의 소통방식이자 우리의 소통방식이다. 우리의 생각도 이 둘을 매개로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축적되고, 축소되고, 확장된다.
마지막은 ‘생각의 주체’에 관한 것이다. 스스로가 생각의 주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다. 이 숲으로의 여행을 통해 내가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태는 아닌지 생각해 보고, 상상력 넘치는 독자들이 ‘아는 것’을 행동할 줄 아는 ‘이해하는 것’으로 바꿨으면 한다. 그냥 보이기 때문에 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일상의 모든 것, 즉 보는 방법, 만지는 방법, 냄새 맡는 방법, 심지어는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는 방법을 현명한 독수리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라는 천재 화가는 후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해 보라. 그리고 자신이 가장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관해 가장 많이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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