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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생각의 천재들>

04. 마르셀 뒤샹의 본질

by BOOKCAST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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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라고 부르는 인지작용은 지각 너머의, 지각보다 상위에 있는 정신적 과정이 아니라 지각 자체를 이루는 본질적 요소다.”
-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


이성은 학습과 경험의 결과물이다. 학습과 경험의 대상은 외부 세계로부터 대부분 공급된다. 문제는 이것이 내가 만든 소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로부터 쌓인 것도 있고, 누군가에 의해 반죽이 되고 구워지고 잘려 접시에 담긴 것들이다. 그렇다고 나의 논리로 점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학습과 경험의 소재, 즉 그 대상은 남들이 정해 놓은 규칙에 맞춰 내 좌측 머릿속으로 진입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연속적인 하체의 움직임을 캔버스에 옮긴 그림이다. 그러나 제목이 ‘누드’지만 실제로 벌거벗은 몸을 그린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은 앙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출품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정숙하지 못한 웃기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출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그림을 그리기까지 마르셀 뒤샹은 생리학자 폴 리셰(Paul Richer)의 인체 스케치나 영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연속동작 사진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리고 자신도 인체의 연속적인 움직임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삼차원의 움직임을 이차원의 캔버스에 담아낸 놀라운 그림을 창안해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 이차원의 공간에 움직이는 시간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이렇게 몇 초간의 움직임이 평면의 캔버스에 담긴 것이다. 이 그림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왜 이 그림의 제목에 ‘누드’가 붙었을까? 실제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을 때는 이 제목도 논란거리였다. 마르셀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하체의 관절과 근육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그는 그리고자 하는 관절과 근육을 제외한 나머지는 과감하게 삭제해버렸다. 그러니 ‘우스꽝스러운’과 같은 평가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번 ‘누드’에 관해 생각해 보자. 누드는 ‘회화, 조각, 사진, 쇼 따위에서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을 계단을 내려오는 하체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마르셀 뒤샹은 다른 부분들은 모두 생략하고 보고자 한 진실,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만을 남겨 그렸다. 그렇다면 이것의 명칭을 ‘누드’가 아니고 무엇으로 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그림의 이름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보다 더 정확하고 좋은 이름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의 이성은 무한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주는 마법을 가졌다. 마르셀 뒤샹 이전의 회화는 움직이지 않는 한 순간만을 포착해 담아내는 이차원적 예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 벽을 넘어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그려낸 마르셀 뒤샹이 놀랍지 않은가? 인간의 이성은 천 년의 관념을 뚫는 물방울이다.

2004년 영국의 터너상(Turner Prize) 시상식에 참석한 500명의 미술계 인사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작품을 선정하는 설문을 했다. 5위는 앙리 마티스의 「붉은 화실(1911)」, 4위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 3위는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1962)」, 2위는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었다. 1위는 무엇이었을까? 1위는 마르셀 뒤샹의 「샘(1917)」이 선정되었다.

「샘(Fountain)」은 당시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소변기를 좌대에 세우고 ‘R. Mutt 1917’이라고 사인을 한 것이 전부인 그런 작품이다. 게다가 사인조차도 자신의 사인이 아닌 소변기 제조업자의 이름과 비슷하게 만들어 붙인 것에 불과했다. 이 작품이 미국 독립예술가협회가 주최하는 앙데팡당전에 출품되었을 때,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며 전시를 거절당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품이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는 것일까?

 


이 소변기를 좌대에 올려 작품으로 변신시킨 순간, 우리는 이것을 ‘소변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용도조차도 소변기와 예술작품은 너무나 다르다. 마르셀 뒤샹은 예술작품의 범위를 ‘작가가 직접 만든 작품’에서 ‘이미 만들어진 산업제품’으로 끌어올려 확대한 것이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이 소변기를 ‘작품’으로 인지하지만, 곧 다른 의문에 빠진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 마르셀 뒤샹의 놀라운 발상은 예술의 경계를 단번에 허물고 무력화시켰으며, 예술의 영역을 무한의 스펙트럼으로 쏘아 올렸다. 이보다 놀라운 이성을 만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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