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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연재38

02. 죽음을 앞둔 환자 에릭 패리시 박사는 호출을 받고 응급실로 가고 있었다. 에릭은 병원 복도를 서둘러 지나갔다. 갑자기 확성기 시스템이 켜지면서 스피커를 통해 녹음된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병원에서는 출산 서비스의 일환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자장가를 틀어주었다. 하지만 에릭은 그 소리가 위층에 있는 정신질환자들에게 고통을 줄 것을 알기에 움찔했다. 그가 담당한 환자들 중에 아이를 사산한 뒤 우울증에 걸린 젊은 엄마가 있었는데, 간간이 그 자장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감정적인 기복이 커지곤 했다. 에릭은 관리실에 자장가 소리가 정신병동까지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항상 스피커 시스템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에릭이 그 비용을 내겠다고 했지만 관리실에서는 안 된.. 2022. 5. 8.
01. 우린 여기 있고, 당신을 속이고 있다. 나는 소시오패스다.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훨씬 영리하고 자유롭다. 규칙이나, 법률, 감정, 상대방에 대한 배려 따위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금세 읽을 수 있고, 연락처를 바로 얻어낼 수 있으며,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조종할 수 있다. 진짜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바로 당신을. 나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 매일 기만하고 있다. 책에서 본 바로는, 24명 중 1명이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걱정해야 할 건 나머지 23명이라고 답할 것이다. 24명 중 1명이면 인구의 4퍼센트다. 소시오패스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거식증 환자는 3퍼센트인데 모두들 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겨우 1퍼센트에 불과한데도 모든 .. 2022. 5. 6.
10. 레이나는 어디든 갈 거야 (마지막 회) “다음은 어떻게 하고 싶어?” 이츠카짱이 묻는다. 보스턴 커먼 ― 호텔 앞에 있는 공원 이름이었다 ― 안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은 참이다. 눈앞의 연못 물은 탁한 녹색이고 연못가에는 개구리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츠카짱은?” 벌써 10월인데 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그 얕은 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가 있다. 그 곁에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는데 강아지 리드 줄 같은 것을 아들의 허리에 매고 그 한쪽 끝을 손으로 감아쥐고 있었다. 아이는 장난감 양동이와 물뿌리개를 들고 있다. 레이나는 남동생인 유즈루를 떠올렸다. 연못 안의 아이는 유즈루보다 어렸지만. “난 다 좋아, 뭘 하든 안 하든.” 이츠카짱이 말한다. “왜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여행은 하고 있는 거니까.” 그건 그렇다고 레이나도 생각한다.. 2022. 2. 1.
09. 바다로 빨려 들어가 버릴까 무서워 마크 말에 따르면, 배는 11월까지만 운항하는 듯하다. 여름철에는 거의 확실하게 어떠한 종류의 고래가 보이는데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그 확률이 떨어진단다. 만약 고래를 보지 못하게 되면, 45달러를 주고 산 승선권은 다른 날 다시 배를 탈 수 있는 티켓으로 교환해 주는 모양이었다. 승선에서 하선까지 전체 여정은 4시간이 소요되었다. 객실은 난방이 되고 있었지만, 먼 바다로 나가자 맑은 하늘이 무색하게 갑판 위는 추웠고 롱패딩이 도움이 됐다. 다만 그것을 입은 이츠카는 사촌 여동생에게도 리비 일행에게도 큰 웃음을 사게 되었다. 매점에는 아동용과 성인용 두 종류뿐이었고 아동용은 레이나에게 딱 맞는 사이즈였는데 남녀공용인 성인용은 이츠카에게는 너무 커서 흡사 어린아이가 어른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2022. 1. 31.
06. 고래 보러 가자 보스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때는 4시 정각이었고. 그런데도 이미 땅거미가 짙다. ‘춥다’는 것이 이츠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왜 이리 컴컴해?” 라는 것이 레이나가 한 말이었다. 자다 깬 멍한 표정이다. 터미널 안 벤치에 앉아 이츠카는 접이식 지도를 펼쳤다. 원래는 걸어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그 부근에 밀집한 호텔 중 한 곳에 방을 잡을 예정이었다. 거기다 짐을 놔두고 거리를 좀 걸으며 상황을 파악한 뒤 조금 이른 저녁(이랄까, 오늘의 첫 끼니)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서 우산 없이는 추우니 가깝더라도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레이나.” 걷는 게 좋은지 지하철을 타는 게 좋은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옆에 있어야 할 레이나는 .. 2022. 1. 28.
04.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선 안 된다. 여덟 시에 일어날 예정이었는데 레이나가 눈을 떴을 때는 일곱 시도되기 전이었다. 블라인드 탓에 방 안은 어둡다. 그래도 사물의 형체가 전부 또렷이 보일 정도로는 밝았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이츠카짱이 깰세라 살그머니 창가로 간다. 블라인드 옆 틈새로 바깥을 보니 이미 해님이 떠올라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본다. 많이 큰 목욕 가운을 입고 선 것은 분명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인데 지금 집을 떠나 이런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쩐지 믿어지지 않았다. 레이나 방에서 수도 없이 작전 회의를 했을 때 ― 그 방! 바로 어제까지 그곳에 있었으면서 벌써 그리워진다 ―, 이츠카짱과 둘이서 이번 여행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을 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이 밖에도 몇.. 2022. 1. 26.
02. 이츠카가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는 ‘No’다.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고급 델리카트슨의 창가 카운터 석에 레이나와 나란히 앉아 이츠카는 지금 김초밥을 먹고 있다. 냉장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그것은 선득하면서 청결한 맛이 났다. “우선 표를 사야 해.” 델리카트슨 바로 앞이 버스 발착지인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이다. 가이드북에는 당일에도 표를 구매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만석일 때도 있다기에 급한 여행은 아니라 해도 만일을 위해 우선 사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소심하게 느껴졌다. 무계획적인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 “맛있다.” 새 모자를 쓰고 신이 난 레이나가 말했다. 호텔 옆 부티크에서 방금 전에 산 그 수수한 니트 모자(모스그린과 카키색이 섞인)는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의 레이나에게 잘 어울린다. “.. 2022. 1. 17.
00. <집 떠난 뒤 맑음> 연재 예고 돌아가는 건 좋지만, 돌아가고 싶어지는 건 싫은 거야. 14살과 17살 소녀들은 단둘이 “미국을 보는” 여행에 나섰다. 아름다운 풍경과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그날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일본 3대 여류 작가 에쿠니 가오리 신작 장편소설 줄거리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14살 레이나. 그녀의 사촌언니인, “예스”보다 “노”가 더 많은 까다로운 17살의 이츠카. 어느 날 둘은 단둘이 미국을 ‘보는’ 여행길에 나선다. 부모들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긴 채로. 「가출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거예요.」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남의 집에서 도그 키퍼까지…….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해프닝도 생기는 그들의 여행은 어린아이들답게 무모하지만..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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