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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3

09. 지금은 진분홍 시간이에요. (마지막 회) 누군가는 ‘뫼르소의 시간’이니 ‘니체의 시간’이니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꽃 뒤에 시간을 붙이는 습관이 생겼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봄까치꽃의 시간, 찔레꽃의 시간, 인동초의 시간, 모란꽃의 시간, 으아리꽃의 시간, 수수꽃다리의 시간, 도라지꽃의 시간, 지칭개의 시간, 분꽃의 시간, 산국의 시간. 한창 아름답게 피어있는 절정 속의 꽃에 시간을 붙여 잠깐이나마 그 꽃으로 인해 쉼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렇다고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든 꽃에 시간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 꽃에나 붙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직관적으로 하는 일인데, 찬찬히 살펴보면 기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충의 기준이 이러하다. 흔한 듯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야 눈에 들어오는, 그래서 .. 2022. 3. 24.
08. 나의 비밀 나무 도서관 가는 길에 ‘나의 비밀 나무’라 부르는 보물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가든형 숯불갈비집 너른 정원에 있는 나무인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내 나무라 정했으니 비밀인 것이다. 내 가슴께 높이의 담장 옆에 있어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나무와 가까이서 눈맞춤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10년 넘게 다녔으니 나무 옆을 10년은 족히 스쳤을 텐데 나무를 알아본 건 최근의 일이다. 귀한 나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므로 귀한 나무라 해야겠다.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건 책벗들과 함께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선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였다. 나뭇잎도 다 떨군 11월 즈음이었을까. 특이한 열매를 매달고 있는 이 나무 아래서 정체 모를 나무에 .. 2022. 3. 23.
00.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연재 예고 제님 식물 에세이 책 모임에서 떠난 1박 2일 모꼬지에서 한 후배가 말했다. “나도 제님 언니처럼 한들한들 도서관 다니고 그림책 보며 여유롭게 살고 싶어.” 뜻밖이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 보였구나.’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 당시 나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나의 속내를 얘기하자면 1박 2일이 아니라 며칠 밤으로도 모자랄 테니까. 아이와 그림책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즈음부터 나는 내내 불행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생각 속에서 온통 불행했다. 육아를 핑계로 잠깐 미뤄두었던 나의 꿈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멀리 달아나 있었고, 동시에 엄습하듯 찾아온 공허와 불안은 얄팍한 자존감마저 추락시켰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지.. 202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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