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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0.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연재 예고

by BOOKCAST 202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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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님 식물 에세이

 

책 모임에서 떠난 1 2일 모꼬지에서 한 후배가 말했다.
나도 제님 언니처럼 한들한들 도서관 다니고 그림책 보며 여유롭게 살고 싶어.”

뜻밖이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 보였구나.’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 당시 나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나의 속내를 얘기하자면 1 2일이 아니라 며칠 밤으로도 모자랄 테니까.

아이와 그림책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즈음부터 나는 내내 불행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생각 속에서 온통 불행했다. 육아를 핑계로 잠깐 미뤄두었던 나의 꿈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멀리 달아나 있었고, 동시에 엄습하듯 찾아온 공허와 불안은 얄팍한 자존감마저 추락시켰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지나온 시간만큼 가정 경제도 나아져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인생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하필 그즈음이었다. 게다가 중년의 나이에 와 있었다.

철없던 이십 대 시절, 중년의 아주머니를 보며 저 나이는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까 생각하며 값싼 동정의 눈빛을 보냈던 바로 그 나이에 당도한 것이다. 그림책으로 인연을 맺은 동네 언니가 저렴한 가격에 스페인 여행을 떠나자고 했을 때도 떠날 수 없는 나는 무척 불행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불행하던 시절이었다. 별것도 아닌 무수한 일이 왕따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불행의 이유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바닷가의 고운 모래알보다도, 여름날의 무성한 나뭇잎보다도 더 많이.

불행하다는 생각에 자기비하나 열등감, 자기연민 같은 것들이 옳다구나 하고 들러붙어 나는 점점 더 깊은 우울의 우물 속으로 파고들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더는 파고 들어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에서 마지막 감정을 만났을 때 피할 도리 없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구성했다. 감정의 막다른 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한, 살고자 하는 삶의 마지막 심리적 저항선이었다. 그러고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나의 믿는 구석으로 삼아 매일매일 딱 하루치의 삶에 충실했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습관처럼 몸에 붙은 읽고 쓰는 삶과 느린 산책, 식물 돌봄이 시든 마음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남들 보기에는 한들한들 여유로운 삶으로 보였으리라. 이런 한들한들한 삶 사이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최하위 비정규직 단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인생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건만, 도리없이 또 부지런히 성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장밋빛 행복을 기대했던 성실함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지고 올라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삶에 대한 단단한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밤이면 속절없이 찾아오는 무력감과 우울감에 물벼락 같은 울음으로 베갯잇을 푹푹 적시곤 했다. 그러고는 아침이면 또 한들한들 충실한 삶으로, 때론 현장에서의 치열한 삶으로 미래를 꿈꾸지 않는 하루치의 삶을 살았다. 단순하게 하루하루 삶에 충실하다 보니 최악의 시나리오는 시나브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마음이 극도로 힘들어진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비밀친구에 의지하다 마음이 회복되면 스르륵 떠나는 비밀친구처럼. 한동안은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했다가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나타나기도 했다.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아이들의 비밀친구처럼 내 가슴속에 비밀스레 품은 최악의 시나리오 위에서 간당간당 위태롭게 네 권의 책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 다섯 번째 책을 앞두고 있다. 앞서 나온 네 권의 책과는 결이 다른, 나의 속내를 많이 드러낸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번째 책 그림책의 책 북토크에서 어떤 독자분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에세이 출간이 예정되어 있는데 책에 기대지 않는 일상 이야기가 될 거예요.”

그런데 원고를 다 정리하고 보니 크게 세 가지 열쇳말이 삼각형으로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 식물, 인연을 맺은 사람들.
오랫동안 책에 기대어 온 사람에게서 책이 빠진 일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원고를 정리하면서 알았다. 오롯이 책과 식물에 기대어 온 삶이었다. 더 소중한 건 책이나 혹은 식물,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나와 연결된,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운명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팀이 가능한 삶이었다. 사실 버티기만 한 삶이 아니었다는 걸 이번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심리적 저항선인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점 흐릿해져 갈수록 삶의 중요한 한 조각 진실을 알았다고나 할까? 행복은 저 멀리서 오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 나의 일상 곳곳에 행복이 널려 있었다.

걸핏하면 낯선 동네의 골목길을 기웃거리고, 울퉁불퉁 옹이에 피어난 벚꽃 한 송이에 아유 예쁘다며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고, 멸종 위기에 처한 구상나무를 우리 동네에서 발견하고는 가끔 찾아가 안부를 물어봐 주고, 아침마다 베란다 식물들에게 귀 기울이며 말걸기를 시도하고, 새끼고양이 셋을 데리고 위험천만한 차도를 건너는 고양이 가족이 무사히 건널 때까지 지켜봐 주고, 문득 가던 길 멈추고 커다란 나무를 안아보며 나무의 지나온 세월을 헤아려 보고, 가을 어느 날은 여름날에 봐둔 진분홍 접시꽃의 꽃씨를 받으러 가고, 산책길에 만난 캣맘에게 우리 동네 길고양이들 소식을 한 바가지 전해 듣느라 해지는 줄 모르고, 나뭇잎에 따라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예민하게 느끼고, 그림자도 짙어지고 마음도 깊어지는 오후 네 시의 풍경에 머무르며 나를 잃어도 보고, 아침마다 똑같은 나무 똑같은 우듬지에 앉아 고운 목소리로 공기를 가르는 새의 간절한 울음소리를 해독해 보려 애쓰고, 비 오는 날 나의 계수나무를 보겠다고 소나기처럼 숲으로 내달리고,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에 흠뻑 기뻐하고, 책으로 연결된 사람을 우연 같은 필연이라며 소중히 여기고.

어느새 나는 마흔의 터널을 지나 나이 오십에 이르러 삶을 가꾸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마음의 손바닥을 불행에서 행복 쪽으로 뒤집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나이 오십에 삶을 가꾼다는 것은 쓸모없이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다. 도무지 말이 되지 못하는 침묵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일이다. 다정한 관찰자가 되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포개는 일이다. 깊고 따뜻하고 가능한 한 작은 이야기를 기어이 글로 남기는 일이며,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번 책에는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행복 씨앗을 발견해 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식물과 책과 사람들에 기대어 더 생기있게 짙어진 초록 이야기가 될 것이다. 경제적인 불안이 기본값인 일상에서 읽고 쓰는 삶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이며, 삶의 재미라곤 없을 것 같은 오십이라는 나이에도 이토록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마흔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서 맞이한 한 줄기 햇살 같은 맛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 살아남는 것을 가장 큰 성공으로 충실한 매일을 살다 보면 환한 오십에 기어이 당도하게 되리라는 한 조각 진실이 흔들리는 마흔들 마음에 가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사적인 이야기가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므로.

 


 

저자 l 제님

한적한 오솔길이나 과꽃 피어 있는 주택가 골목을 사부작사부작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소하고 겨우 존재하는 것에 마음이 가고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저절로 피고 지는 모든 풀꽃과 나무들, 햇살과 바람과 가을 풀벌레 소리를 좋아하고,
말라비틀어진 들꽃대와 가을 열매들, 그리고 그림책과 도서관을 사랑합니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고 이화여대에서 불어교육과 영어교육을 공부했습니다.
그림책 모임과 강의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며, 책과 식물에 기대어 지금을 살고 있습니다.
『그림책이 좋아서』(2013), 『포근하게 그림책처럼』(2016), 『그림책 탱고』(2017), 『그림책의 책』(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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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목차]

01. 창이 있는 부엌으로의 여행
02.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
03. 죽은 화분에 3년 동안 물을 주다 
04. 뒷모습을 보는 일
05. 나의 친애하는 나무에게 전하는 말
06. 비켜나 있음의 쓸모
07. 애도의 선물로 찾아온 인연
08. 나의 비밀 나무
09. 지금은 진분홍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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