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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4. 뒷모습을 보는 일

by BOOKCAST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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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환상의 빛>을 보고 나는 꽤 오랫동안 열병을 앓듯 얼이 빠져 있었다. 영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물음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난감했다. 영화가 끝난 지 오래건만 여전히 선연한 이미지가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펼쳐졌고, 어느 날은 주인공 유미코가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듯 울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했다.

유미코와 남편 이쿠오의 행복한 일상이 봄날처럼 흘러간다. 갓 태어난 아기의 옹알이와 함께. 오늘 아침도 이쿠오는 여느 때와 같이 아내 유미코의 다정한 배웅을 받으며 출근한다. 유미코는 집 앞에서 남편이 주택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남편의 뒷모습을 좇는다. 남편은 한 번인가 아내를 향해 돌아보고는 아침의 밝은 빛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편은 퇴근길에 철로를 걷는다. 기차가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봄날처럼, 부드러운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 같은 일상에 자연스러운 한 점과도 같이.
유미코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은 남편의 뒷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뒷모습이라면 가슴에 깊은 우물이 하나 생길 것 같다. 칠흑같이 어둡고 돌멩이 하나 던지면 결코 퐁,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우물 말이다. 분명 이때부터였다. ‘뒷모습이란 단어가 심장에 콕 박혀버린 순간이. 그리고 바로 그즈음에 우리 집 고양이 레오의 뒷모습이 가슴에 들어왔다. 레오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여러 생각들이 들숨과 날숨으로 직조되면서 평소보다는 생각이 깊어지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내 감정의 대부분은 애잔함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평소와는 달리 비장한 결심 같은 것도 해보게 되고. 그래서일까? 영묘한 레오는 내게 자주 등을 보여 주곤 했다.


뒷모습, 뒷모습, 뒷모습….
자꾸만 누군가의 뒷모습만 들어왔다. 그리고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에 대하여 그리고 뒷모습의 표정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그리곤 심장에 사금파리처럼 박혀 도무지 떠나갈 것 같지 않은 뒷모습에 대해 뭔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글 비슷한 뭔가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그림책 원고라 부르고 싶었다. 그제야 좀 심장의 맥박이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이 조금 많이 이상해져.
동물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다 그래.
정말 이상하지?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 해서
그 모습 그대로 고백의 말이어서 그런 걸까?

아이야엄마는 너의 뒷모습에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가 없구나.
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게 돼.
한쪽 어깨가 기울어져 있기라도 하면 엄마 가슴이 서늘해진단다.

기도하는 사람의 뒷모습에는 간절함이 느껴져 덩달아 기도하게 돼.
마음을 다해 함께 빌게 된단다.
그럼그의 기도가 엄마 기도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고요해져.

(강아지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저 할아버지는 어때?
쓸쓸함과 애틋한 그리움이 뚝뚝 떨어져.
얼마 전에 사랑하는 반려견을 영원히 떠나보낸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누군가를 잃고 나면 비슷한 모습에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거든.

누군가의 뒷모습에 슬픔의 무늬만 아롱지는 건 아냐.

하나가 아닌 둘은 정겨운 풍경으로 다가와.
바로 너와 고양이 레오처럼.
함께 나아가니까.
다정함이 배어 있으니까.
어떤 마음이든 마음을 나눌 곁이 있으니까.
혼자라도 책이 있고연필이 있으면
휴우안심이 돼.
손에 들린 한 장의 나뭇잎이라도 충분해.

할머니의 구부정한 뒷모습은 어떨까?
쓸쓸할 게 분명하다고?
엄마 눈에는 나뭇잎처럼 곱게 물든 할머니 마음이 보이는걸.

엄마는 산책길에서 가끔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만나기도 해.
아직 따뜻한 마음만 남아 있어.
사람의 마음을 순하게 물들이는 뒷모습이란다.

아이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뒷모습을 본 적 있니?

어느 여름날의 깊은 밤엄마는 노트에 이런 문장을 썼어.
오늘 가장 슬픈 것을 보았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너의 뒷모습을 본 날이야.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너를,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단다.

어느 날은
엄마도 문득 내 뒷모습이 궁금해졌어.
내 뒷모습은 어떨까?
내 뒷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서 내 뒷모습을 가장 많이가장 오래 본 사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 뒷모습을 바라봐주는 사람,
바로 엄마의 엄마할머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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