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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5. 나의 친애하는 나무에게 전하는 말

by BOOKCAST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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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살면서 나는 자작나무와 사랑에 확 빠졌다. ‘도시에 살면서’라는 말은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있었다 해도 그때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잔가지 없이 곧게 뻗은 몸통을 감싼 하얀 수피, 잎자루가 길어 여린 바람에도 파샤샤파샤샤 팔랑이는 연초록 이파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파리 뒷면에 살짝 숨겨둔 은빛의 찰랑거림. 자작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단연코 자작나무였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아갈 무렵 자작나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 사람이 확 좋아졌고, 우리는 자작나무에 대해 길고 긴 수다를 떨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을 다녀와서는 나중에 꼭 함께 걷자는 약속도 했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봤다던가, 내가 재밌게 읽은 책을 읽었다 하면 급속도로 관심이 가는 것처럼. 내게 자작나무는 그런 영화였고 책이었다.
 
어느 가을날, 서울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를 보고 나는 순간 아찔했다.
아, 이런 감나무라니!
아무런 조화가 없는데도 고풍스럽고도 운치 있는 감나무 한 그루가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우고 있었다. 얼마간은 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얼마간은 아직 나뭇가지에 헐렁하게 남아 주홍빛 감들과 절묘한 어울림을 빚어내는 이파리는 가을이라는 계절에 썩 어울려 감나무의 고요한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간 아찔했던 건 감나무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닷없이 만난 충격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내 어린 날의 감나무가 아주 멀리서 불현듯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할 줄 모를 미안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그 감나무는 내가 많이 좋아했던 우리 집 시골 마당에 깊고 푸른 그늘을 드리웠던 아름드리나무였는데, 내내 외로웠던 어린 날의 나와 항상 함께했던 엄마의 품속 같은 고마운 나무다. 남의 집 마당에 서서 아름다운 감나무를 안아보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바쁜 학창 시절을 지나 도시로 나오면서 나는 감나무 같은 건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시골집 가까이에 도로가 나면서 이사를 가는 날에도 나는 감나무의 안부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내 가슴 속에는 이미 근사하고 세련된 자작나무가 살고 있었고, 나의 외로운 시간들을 함께한 감나무가 무참하게 베어졌을 시간에도 나는 도시에서 아주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최순우 옛집에서의 그날 이후 감나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마음에 큰 짐이 부려졌다.

나의 감나무는 그루터기조차 없이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처럼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슴 속에 미안함이 자라는 동안 자작나무 옆에 감나무가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고, 이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감나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감나무와 자작나무는 다른 결로 각각 아름답다.

나에게 “감나무가 좋아? 자작나무가 좋아?”라고 묻는 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감나무를 선택하겠다. 감나무는 나의 서사와 서정을 품고 있는 나무니까. 게다가 무턱대고 정감 가는 나무니까. 또한 어느 모로 보나 고풍스럽게 운치 있는 나무로는 제일이니까.
 
가슴 속에 뒤늦게 들어온 감나무가 나의 서정을 더 풍성하게 돌봐준다. 아름답게 운치 있는 감나무가 있는 두어 곳을 기억했다가 가끔씩 찾아가서 마음을 기대곤 한다.

가끔씩은 감나무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미술평론가 김용준의 수필 <노시산방기(老柿山房記)> (『새 근원수필』)를 읽으며 무척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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