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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2.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

by BOOKCAST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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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현관을 나서면 1분 만에 도착하는
오솔길.
아파트가 아니라면
우리 집 마당이나 다름없는 곳.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만큼
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치를 이루어
내가 나무 터널이라 부르는 곳.
이 숲길을 매일 걷고 또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쌓인다.
자연이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눈길을 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이라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연에 대해 각별히 놀라워할 줄 아는 눈을 가진 나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오늘도 자연에 깃든
하늘바람나무새들고양이와 눈 맞춤 하느라
느릿느릿 걷는다.
느린 걷기는 내가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햇살 좋은 날에는 그림자와 함께 걸었고 눈이 오는 날에는 설렘으로 걸었다. 무의식의 심연 같은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이끌리듯 걸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한껏 쓸쓸함을 걸치고 걸었다. 사실은 매일같이 이십 년을 걸었다.
나의 산책길 얘기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와 함께 걸었는데 낮에도 걷고 밤에도 걸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줄곧 혼자 걸었다. 속절없이 내가 작아지는 날이나 우울의 그림자가 저만치서 기척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오솔길로 숨어들었다.

어떤 일이든, 누구에게든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마음이 베이거나 마음이 심하게 부서지는 날에도, 고백하기 창피할 만큼 작은 일에 화가 나는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그 오솔길 위에 있었다.

대부분은 걷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나가기 전에 시 한 편이나 글 한 줄, 또는 그림책 한 권을 읽고 나갔다. 방금 전에 읽은 문학은 오솔길의 다정하고도 너른 품 안에서 좀 더 선명한 이미지로 펼쳐지거나 사유가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그 시를, 그 문장을, 그 그림책을 흡족하게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어쩌다 한 번 해보고는 좋아서 습관이 되었다.

글을 쓰다가 막혀도 오솔길을 찾았다.
귀를 열고 바람을 느끼며 무심하게 걷다 보면 막혔던 문장이 술술 풀리고 글의 구성까지 짜여지는 마법이 정말 일어난다. 곧 있을 강연 자료를 읽고 나가 강연 1회 분량을 거뜬하게 마치고 자신감이라는 훌륭한 무기까지 장착하고 오기도 했다.

아파트 7층인 우리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걸어서 열 걸음이면 당도하는 나의 오솔길.
하늘로 쭉쭉 뻗은 시원스러운 메타세쿼이아 숲에서 시작해 곧 길 양쪽에서 높이 자란 중국단풍나무가 아치를 이루는 나무 터널로 이어진다. 이십 년 동안 변화무쌍한 내 모든 감정의 나날들과 함께한, 속 깊은 친구 같은 오솔길이다. 그 길 안에서 네 권의 책을 썼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책이 될 수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의 책을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던 무참한 시간들, 스스로 독방에 갇혀 홀로 지낸 고독의 시간들, 글을 쓰는 것도 힘들지만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들, 온통 모호함투성이에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오솔길 덕분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 사십 대를 무사히 통과해온 것 같다.

오십 줄에 들어선 지금, 조금은 잔잔한 마음으로 오솔길 위에 서 있다. 돌아보니 길 위에 펼쳐놓았던 20년의 감정들이 어느 가을날의 낙엽처럼 수북하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이어폰으로 지오디의 <길>이란 노래가 들려온다.
 
가슴이 뻐근해지며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여전히 건듯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고 만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다독일 만큼 마음이 조금은 더 단단해졌다. 잘 가고 있노라고.
사십 대도 견뎌냈는걸.
나의 속 깊은 친구, 오솔길아.
나의 오십 대도 함께 걸어줄 거지?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지오디 <중에서

 


마침 퇴근해 오던 남편과 오솔길 시작점에서 마주쳤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에 대해 얘기하며 얼마 전에 크러쉬가 이 노래를 부르다가 폭풍 울음을 울었다고 하니, 남편이 그런다.
이 노래에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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