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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1. 창이 있는 부엌으로의 여행

by BOOKCAST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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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없지만 나만의 풍경을 품은 부엌 창이 있다.
오늘 표정은 햇살을 가득 머금고
무꽃처럼 방긋 웃고 있다.
눈 내리는 표정도 좋고
비가 내리는 날엔 비가 내려서 좋고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바다의 파랑 같은
나무의 출렁거림이 좋다.
감각할 수 있어서 좋다.
창턱에는 단아한 옹기 항아리와 보랏빛 나팔꽃과
다섯 살 딸이 빚은 고양이 도자기와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와 돌멩이,
메타세쿼이아 열매로 만든 줄 커튼.
창 너머로는 버드나무아그배나무벚나무메타세쿼이아,
얼마 전에 이사한 건물 옥상 위의 고양이 가족.
저 멀리 자그마한 숲.
내 집이 아니어도
부엌 창이 있는 집이라면 그런대로 괜찮다.


1794년에 쓰인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어쩌면 여행과 가장 먼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요즘 훨씬 더 적절해 보인다. 가장 친숙한 공간에서 가장 익숙한 것들로 떠나는, ‘구경’이 아니라 ‘발견’의 여행이다. 의자, 침대, 서가, 초상화, 애견 로진….
드 메스트르를 따라 해 볼까?

내가 좋아하는 공간, 부엌으로의 여행이다.
작은 창이 있는 부엌은 내가 많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직사각형의 자그마한 창이지만, 그 창으로 만나는 세계는 결코 작지 않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시원스레 줄지어 서 있고, 그 너머 벚나무 가로수 길은 5월이면 하얗게 불을 밝히고 가을이면 주홍빛으로 물들어간다. 벚나무 너머에는 병풍처럼 야트막한 동산이 둘러서 있는데 봄이면 서서히 번져가는 연초록이었다가 여름이면 짙은 초록 캔버스를 연출한다. 이내 붉은빛 파스텔 가을을 지나 겨울의 빈 숲은 복숭아빛 노을로 맛있게 익어간다.

어느 날은 벚나무 사이에 있던 상가 주택 옥상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옥상에 꼬물꼬물 움직이는 작은 물체들이 포착된 것.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살폈다.
앗! 그 고양이 가족?
얼마 전에 새끼 고양이 셋을 데리고 아슬아슬 도로를 건너 내 애간장을 녹였던 바로 그 ‘냥이’들이었다.
참 다행이야. 엄마 고양이가 찾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고양이 가족의 동선을 쫓아가며 한참을 놀다 시선을 창턱으로 천천히 데려오면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끈으로 줄줄이 엮어 창에 매달아 둔 메타세쿼이아 열매가 여린 바람에 흔들흔들. 그 줄 사이사이 끼워 둔 말린 나뭇잎과 노랗거나 빨간 가을 열매도 흔들흔들. 엊그제 산책길에 데려온 한 줄기 수수꽃다리 향도 살랑살랑.

계절 따라 조금씩 표정을 달리하는 자연 커튼의 맛이다. 자연 커튼을 배경으로 창턱 위 무대 또한 시시때때로 풍경을 달리한다.

한겨울에는 초록 당근 숲과 무청이 피워 올린 연보랏빛 무꽃이 너울너울 끝도 없이 피고 지고. 봄이면 산책길에 꺾어온 노란 씀바귀꽃이, 가을에는 보랏빛 쑥부쟁이가 두어 송이 물컵에 담기고. 5월 어느 날엔 잘 익은 황금빛 매화 열매 몇 알이 놓이기도 하는데 창가에 달콤한 향이 흥건하다.

가을이면 알록달록 가을 열매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겹게 오르고, 늦가을에 어김없이 한 자리 차지하는 모과 한 알은 모과향을 은연하게 퍼뜨린다. 모과 옆에는 도서관 옆에서 데려온 산국 한 줄기가 아직 노란 빛깔과 머리를 맑게 하는 진한 산국향을 품고 있다.

부엌에 설 때마다 손은 열심히 일을 하고, 눈과 마음은 온통 창턱 위 자연물과 창밖 풍경에 홀려 있다. 부엌에서 노동하는 내 시간이 좀 순해지는 이유다.
내 집이 아니라도 창이 있는 부엌이라면 마음이 괜찮다고 그런다. 그러니 한사코 창이 있는 부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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