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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3. 죽은 화분에 3년 동안 물을 주다.

by BOOKCAST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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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에서 화분에 자라는 오죽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거죽이 까만 가느다란 대나무가 그저 국숫가락마냥 몇 가닥 서 있는데 어찌 그리 우아하고 기품이 있던지! 머리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는데 마음으로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안도현 시인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제목 같은 그런 이미지라면 좀 설명이 될까?
 
그런데 선뜻 사지 못하고 아쉬움만 가득 안고 돌아왔다. 빠듯한 살림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은 화분에 큰돈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홀딱 빼앗긴 터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생일선물로 오죽을 데려오게 되었으니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살피고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바람이라도 불면 검은 대나무가 몸을 흔드는 소리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오후 햇살을 받은 대나무 검은빛은 더욱더 윤기 나게 반짝였다. 그런 날이면 특별히 뜰 안에 오죽이 있어 오죽헌이라 불리는 강릉의 오죽헌 뒤뜰을 떠올리며 고즈넉한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오죽은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 동안 온갖 사랑과 정성을 독차지하며 자연스러운 생명의 순환을 거듭했다. 이미 나와 있던 대나무 줄기는 죽기도 하였고 새로 죽순이 돋아나면 새로운 줄기를 다소곳이 반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오죽이 모두 죽은 듯했다. 예감이 불길했다. 정말 죽은 걸까? 정말 죽은 거라면 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책감과 속상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호통재라!’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정을 나눈 오죽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흙 속의 뿌리는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물을 주면 언젠가는 새로운 죽순이 나올 거라 믿었다. 그러고는 예전과 변함없이 아침저녁으로 살피며 물을 주었다. 이미 삭정이가 된 대나무는 쓰러지지 않도록 잘 세워두었다. 물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새로운 죽순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는 여전히 언젠가 연초록 새순을 삐죽 내밀지도 모르는 오죽의 화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 화분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풀꽃 씨앗, 꽃마리가 피고 지고 있었다. 허전한 그곳에 담쟁이덩굴 한 줄기를 툭, 꽂아두기도 했다.

이미 죽은 화분에 3년이 꽉 차도록 물을 주던 어느 봄날 아침, 나는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대나무 삭정이를 뽑았다. 3년 전의 그날의 마음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오죽의 죽음을 그제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순간 애도(哀悼)란 단어가 떠올랐다. 3년이란 시간은 애도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마음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떠나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풍장하듯 애끓는 슬픔이 시나브로 시간에 흩날려진 것이다. 내 마음이 흡족하게 충분히 슬퍼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옛날 고향 마을에서 많이 봤던 영우(靈宇)’가 떠올랐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장례가 끝나고 마루 한쪽에 영정 사진을 놓을 공간을 마련해 두고 아침마다 밥을 올리던 곳.  3년이 지나면 떠나보냈다. 진짜로 혼령이 떠나는 날이다. 어릴 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3년은 애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애도에 최소한 3년의 세월은 필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식물 하나 떠나보내고서야 그 이치를 깨닫는 우둔함이라니.

죽은 오죽 화분을 돌보며 애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깟 식물의 죽음을 두고 3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사람의 죽음은 어떠하랴? 더욱이 꽃봉오리처럼 한창 피어날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이라면? 게다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면? 3년이 아니라 10년이라도, 아니 평생으로도 충분치 않을 애도의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그해 여름, 방송인 김제동은 농성 중인 유가족을 찾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말이 난무하던 때였다.
제가 어렸을 때 촌에서 자랐는데 송아지를 팔면 어미 소가 밤새도록 웁니다. 일주일 열흘, 끊이지 않고 웁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끊어질 듯이 웁니다. 저 소는 왜 우냐고 타박하는 이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야 좀 알 것도 같다.
애도를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란 건 없다는 걸. 상실의 슬픔을 앓는 자가 마음껏 충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걸. 함부로 그만 울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더군다나 그쯤이면 됐지 않느냐는 말은 더더욱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충분히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옆에 가만히 있어 줘야 한다는 걸. 울던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 일어서서 걸어 나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봐 줘야 한다는 걸. 우아하고 기품 있는 나의 까만 대나무가 알려주고 떠났다.
뒷모습까지도 기품 있는 나의 오죽이여, 이젠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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