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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9. 지금은 진분홍 시간이에요.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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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뫼르소의 시간이니 니체의 시간이니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꽃 뒤에 시간을 붙이는 습관이 생겼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봄까치꽃의 시간, 찔레꽃의 시간, 인동초의 시간, 모란꽃의 시간, 으아리꽃의 시간, 수수꽃다리의 시간, 도라지꽃의 시간, 지칭개의 시간, 분꽃의 시간, 산국의 시간.

한창 아름답게 피어있는 절정 속의 꽃에 시간을 붙여 잠깐이나마 그 꽃으로 인해 쉼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렇다고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든 꽃에 시간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 꽃에나 붙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직관적으로 하는 일인데, 찬찬히 살펴보면 기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충의 기준이 이러하다.

흔한 듯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야 눈에 들어오는, 그래서 마음에 미세하나마 파문을 일으켜 가슴에 서정이 깃들게 하는 꽃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대체 어떤 꽃들인가? 그것 또한 직관이 하는 일이다.
 
지금은 6월이고, 접시꽃의 시간이다. 그러니 내 손 안의 휴대폰에 박혀 있던 시선을 풍경 속에 두면 심심치 않게 접시꽃을 만날 수 있다. 커다란 꽃송이보다는 자잘한 꽃을 더 좋아하지만, 웬일인지 접시꽃만은 예외다.

대책 없이 그냥 좋다. 가슴에 폭 안기는 접시꽃에 속수무책 마음이 뭉근하게 풀어져버린다. 접시꽃만 보면 어느새 나는 어느 시골 마을 고샅길을 기웃거리며 사부작사부작 걷고 있다. 길모퉁이 어딘가에 분명 접시꽃 두세 그루는 서 있을 그런 고샅길 말이다. 접시꽃이 대책 없이 그냥 좋다고 했지만, 접시꽃이 데려오는 정서 때문이 아닐까? 가만 생각해본다. 정겨움이라든가 희미한 그리움이랄지, 어떤 애틋함 같은 것.

그도 그럴 것이 접시꽃은 잘 가꾸어진 정원보다는 마을 어귀나 대문 앞, 길가 또는 담장 안쪽과 바깥쪽에서 볼 수 있다. 마을 어귀나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환한 빛깔로 마중 나온 것만 같아 정겹고, 그럴 때 접시꽃은 가장 아름답다.
 
6월의 어느 느지막한 오후, 나는 접시꽃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봐 둔 곳인데, 시골집 마당 입구에 다보록이 피어난 진분홍 접시꽃이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그림책 넉 점 반의 아기가 입은 치마, 바로 그 빛깔이었다.

저만치 보이는 접시꽃에 입맛을 다시며 다가서는데 난데없이 검정개가 사납게 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붉은 혀를 길게 늘이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는 아주 한적한 마을이라 더 무서웠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냅다 뛰어 도망쳤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심하게 흔들리던 검정개의 꼬리가 그제서야 보였다. 혹시 내가 너무 반가워서 뛰어왔던 건 아닐까?

그리고 며칠 후, 그래도 진분홍 접시꽃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찾아갔다. 주위를 경계하듯 기웃거리면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동네 개들이 여기저기서 짖어대기 시작했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럽게. 집 안에 묶여 있는지 개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 묶인 채로 짖고 있는 며칠 전의 검정개를 발견하고는 다행이다 싶었는데, 어디선가 털이 덥수룩한 강아지가 갑자기 다가오며 짖어댔다.

또 도망가야 하나, 주춤거리며 서 있는데 접시꽃 마당의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이층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요기 접시꽃이 너무 예뻐서 사진 좀 찍으려 하는데요. 강아지가 무서워요.”
 
접시꽃이 예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할머니 목소리가 좀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고, 하얀 러닝셔츠 차림으로 강아지를 쫓으며 계단을 바삐 내려왔다.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강아지가 내 옆으로 오지 못하도록 강아지를 다독이며 나를 지켜 주었다.
 
? 잘 안 나와? 요새 비가 안 와서 벨라 안 이뻐. 아침에는 쪼까 괜찮은께 낼 아침에 와서 찍어요.”
지금도 충분히 예뻐요. 할머니, 저는 진분홍 접시꽃을 제일 좋아해요.”
그라제. 나도 그려.”
 
할머니 덕분에 무사히(?) 접시꽃을 잘 담아 왔다. 가을 즈음엔 접시꽃 씨앗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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