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에세이/<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08. 나의 비밀 나무

by BOOKCAST 2022. 3. 23.
반응형
 

 

도서관 가는 길에 ‘나의 비밀 나무’라 부르는 보물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가든형 숯불갈비집 너른 정원에 있는 나무인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내 나무라 정했으니 비밀인 것이다. 내 가슴께 높이의 담장 옆에 있어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나무와 가까이서 눈맞춤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10년 넘게 다녔으니 나무 옆을 10년은 족히 스쳤을 텐데 나무를 알아본 건 최근의 일이다. 귀한 나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므로 귀한 나무라 해야겠다.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건 책벗들과 함께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선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였다.
 
나뭇잎도 다 떨군 11월 즈음이었을까. 특이한 열매를 매달고 있는 이 나무 아래서 정체 모를 나무에 대해 우리는 오래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이곳저곳을 뒤적거려 드디어 알아냈다. 꽃이 튤립을 닮았다 하여 튤립나무라고 부르는 백합나무였다. 꽃은 5월과 6월 사이에 피는데 백합나무의 아름다움은 꽃에 있다고.

실물로 꽃을 꼭 보고 싶은데 큰일이었다.
개화 시기를 딱 맞출 수 있을까? 또 파주에서 북촌마을 골목 끝자락에 있는 중앙고등학교까지는 어떻게 간다지? 학교 정문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백합나무 때문에 그렇게 가슴 앓이 하는 사이 참으로 우습게도 아주 가까이에서 발견했다. 발견한 것이 아니라 10년 동안 스쳐 지나간 나무를 그제야 알아본 것이다.
도서관 가는 익숙한 길목에 한옥마을의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 보았던 그 특이한 열매를 매달고 멋스럽게 서 있었다. 바람에 떨어진 가지 하나 주워 집에 들이니 겨우내, 그리고 봄을 지나 여름까지 마루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날 이후 나의 비밀 나무가 되어 도서관에 오갈 때마다 눈으로 마음으로 쓰다듬곤 한다.
 
5월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불현듯 백합나무가 떠올랐다. 나는 너무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꽃을 보러 달려갔다. 정말 튤립을 닮은 녹황색 꽃이 소담스레 피어 있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널따란 나뭇잎에 가려 가까이 가지 않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으니 비밀스레 피어난 꽃이다. 토성의 고리처럼 꽃송이 아랫부분에 주홍 빛깔의 띠가 참 매혹적이다.

혼자 보기 아까워 가슴이 두근두근. 바로 길 건너 카페에 친한 언니가 구석 어디선가 책을 보고 있을 텐데, 백합나무를 두고 두 가지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나의 비밀 나무를 빨리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비밀 나무이니 영원히 혼자만 보고 싶다는 마음. 자랑한다면 꽃이 피었을 때 해야 되는데, 일단 올해는 그냥 넘어가고 내년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백합나무가 있는 곳을 한 곳 더 알게 되었는데, 책모임에서 백합나무 꽃 사진을 보여주며 백합나무가 있는 곳을 말해주니 그걸 또 받아 적는 선배가 있었다. 백합나무가 있는 곳이 뭐 그리 중하다고.

가끔 또는 자주 다니는 익숙한 길목에 비밀 나무 한 그루 마음에 품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백합나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받아 적는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