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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사별4

06. 홀아비 (마지막 회) 회사엘 다니던 당신은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지. 딸이 아주 어렸던 시절. 나는 일요일이면 딸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지. 아동극을 보러 간다거나 한강 고수부지로 나들이를 간다거나 그냥 백화점 구경을 가기도 했지. 좀 더 큰 후에는 서점엘 데리고 나갔다가 퇴근하는 당신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고. 일요일마다 혼자 딸을 데리고 나가는 나를 보며 아파트 주민들은 홀아비인 줄 착각을 했고, 너무 젊어서 홀아비가 된 나를 불쌍히 생각한다는 얘길 전해 듣고 우린 한참을 웃었지. 20년도 넘은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당신은 떠나고 난 진짜 홀아비가 되었어. 매주 어린 딸과 함께 나가던 그땐 내가 그의 손을 잡았지만, 이젠 가끔 딸이 내 팔짱을 끼기도 하지. 양 갈래로 곱게 머리를 땋은 딸이 아니고 이젠 서.. 2022. 6. 18.
03. 쑥갓 점심으로 시킨 동태탕 위에 쑥갓 몇 잎이 얹혀 나왔네요. 쑥갓 향은 참 특이하지요.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그 쑥갓을, 쑥갓 향기를 오늘, 오랜만에 다시 만나네요. 우린 주말농장 텃밭 한편에 쑥갓도 길렀지요. 쑥갓만큼은 모종이 아니라 씨를 뿌리겠다고 고집하던 당신. 당신이 떠난 후, 나는 그 알량한 농사일도 그만두었어요. 따뜻한 봄 햇살 속에 씨를 뿌리던 당신 모습, 쑥쑥 자라는 채소들을 보며 ‘아이구, 고마워라’며 연신 감탄하던 당신의 목소리,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김을 매고 있노라면 그늘에 앉아 ‘그만 하고 오라’며 흔들던 당신의 손짓,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그곳에서 나 혼자 덩그러니 채소를 가꾸는 일이 부질없어진 것이지요. 오늘은 당신과 마주한 일요일 저녁상이 아닌, 어느 식당에서 쑥갓 향을.. 2022. 6. 15.
01. 흔적 아침이면 블라인드를 열며 창밖 대추나무에 와서 시끄럽게 구는 새들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이 거기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기 좋아하던 당신, 당신은 아직 그렇게 창가에 서서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접힌 책갈피로 혹은 낯익은 글씨로, 밤늦게 집에 들어오다 보면 술 취해 돌아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일요일 저녁 밥상에 앉아 함께 술잔을 나누다 보면 조금 말이 많아진 붉어진 얼굴로, 화초 위에 맺힌 물방울로, 성모자상 앞에 놓인 묵주로, 잘 닦인 싱크대의 반짝임으로, 아침이면 커피 내리는 소리나 그 향기로 신문 위에 놓인 붉은 테의 돋보기로, 때론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로, 가을만 되면 이미 소파에 놓여있던 담요로, 당신은 늘 거기에 그렇게 있습니다. 2022. 6. 13.
00. <그녀를 그리다> 연재 예고 박상천 시집 우리 인생엔 어느 날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한 어둠 속에 버려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시인에겐 아내와의 사별이 그랬다. 급작스럽게 아내를 떠나보내고 시인은 ‘의미 없는 시간의 한구석’에 버려졌다고 느낀다. 아내의 부재는 모든 곳에서 왔다. 겨울이 깊어져도 바뀔 줄 모르는 여름 이불로, 단추가 떨어진 와이셔츠 소매로, 김치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도마로, 커피 머신으로 양치 컵으로 쑥갓으로, 아내는 ‘없음’의 모습으로 시인의 곁에 내내 머문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삶 곳곳에 남아 있는 아내의 흔적들에 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늘 있지만 늘 없는 아내를 생각하며 시를 쓰다가 시인은 아내의 웃음만이 아니라 도란거리는..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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