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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도/<육백 리 퇴계길을 걷다>

05. 마을 길 굽이굽이 넘어 드디어 안동 도산서원!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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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 리 귀향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개용수재

매정저수지 둑 앞의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용수재로 가는 골매마을이고, 왼쪽으로 꺾어지면 산 중턱의 쥐심골이다. 직진하여 매정저수지를 지나면 그 끝에 거대한 느티나무 세 그루와 용두정(龍頭亭)이 있다. 골매마을 분들을 위한 작은 쉼터다. 귀내마을에서 큰 고개 두 개를 넘는 약 5km 한 시간 반 거리이고, 대재 다음으로 높은 용수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충분히 쉬어갈 타임이다. 느티나무 너른 그늘 용두정에 앉아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식히며 에너지를 보충한다.

* 안동 녹전면 용수재 용운사에서 바라본 대재 산과 산줄기
 

드디어 용수재를 넘어가기 위해 출발이다. 골매마을을 가로지른 오르막길을 서서히 올라가는데, 한 300m쯤 가서 갈림길이 나온다. 넓은 길이 오른쪽(남)으로 꺾이고, 상대적으로 좁은 길이 직진이다. 내가 처음 육백 리 귀향길을 걸어갈 때 지도를 숙지하지 않은 채 너무 자신 있게 길을 가다가 여기서 헷갈렸다. 넓은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서 들어갔다가 혹시나 하여 주민에게 물었더니 직진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큰일 날 뻔했다. 육백 리 귀향길을 가는 사람들은 헷갈리지 않도록 산 중턱에 있는 ‘용운사’의 안내표지판을 보며 따라가면 된다.
 
퇴계 선생은 한티[大峴]를 넘었다. 여기서 ‘한’은 대한민국에서의 ‘한’과 같이 ‘크다, 우두머리, 임금’이란 뜻이다. 한티는 이 지역에서 제일 큰 고개란 의미다. 요즘엔 용수사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용수재’라 부른다.
 
한티를 넘는 길은 두 개였다. 하나는 잘못 들어섰던 길로 가는 것이고, 하나는 오늘 가는 길이다. 이 중에서 덜 험했던 길은 잘못 들어섰던 길이고, 퇴계 선생도 그 길을 따라 한티를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지금은 고개 정상 부근에서 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산불 등 산을 관리하기 위해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임도(林道)를 따라가는 오늘의 이 길로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이 정해졌다.
 
 
 
도산서원에서 방글이가 되었다

갑자기 이태호 교수가 옷을 매만지신다. 9일 내내 같은 옷을 입고 걷던 분이 갑자기 옷을 매만지시니 궁금해서 여쭌다.
“왜 그러시나요?”
이런 대답이 날아온다.
“그래도 도산서원에 다 도착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잘 알다시피 퇴계 이황은 조선 성리학을 완성한 최고의 학자이자 지성으로 꼽힌다. 이렇게 아름다운 안동 낙동강변에서 퇴계학을 이루었고, 후학을 길렀다. 도산서원은 그 중심터이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과거급 제자를 배출했고, 퇴계학문풍을 잇는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했다. 그 퇴계의 기운이 충만한 자연을 만나는 이태호 교수의 경건함이 좋다.
 
도산서원이 가까워지니 기운이 나고, 길도 내리막길이다. 도산서원의 본 주차장에 도착하기 300m 전, 우리를 기다리는 분들의 모습이 꽤나 많다.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다들 반기는 얼굴 표정까지 보인다. 느리게 걸어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앞서갔던 우리 일행 두 분, 그리고 이태호 교수와 나의 지인 여러분이 서성이며 반갑게 우릴 기다린다.
 

* 수백 년간 도산서원 앞 뜰을 지키고 있는 왕버들
 
* 봄 옷 입은 왕버들 고목
 

경복궁에서 출발하여 도산서원에 도착했던 다섯 번 중 두 번은 환영하는 이 전혀 없었고, 두 번은 환영하며 기다리는 이 두 분이셨다. 어느 경우가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환영하는 분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기분은 다 좋더라.

그런데 아직은 도산서원 주차장이니 끝이 아니다. 매표소를 통과하고 안동호 호숫가를 따라가면 서울의 경복궁에서 시작된 육백 리 귀향길 걷기의 도착지 도산서원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는 이미 서산을 넘었고, 서원 앞 시사단(試士壇)의 낙동강물도 어슴프레하다. 봄저녁 너른 안동댐 호수를 눈에 담으니, 죽령 너머 들길 산길에서 겪었던 갈증이 일시에 해소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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