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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도/<육백 리 퇴계길을 걷다>

02. 남양주에서 양평으로_중앙선의 옛 철로가 만들어낸 풍경을 따라

by BOOKCAST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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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역자전거의 메카

둑길 끝머리에 한옥으로 단장한 멋진 카페와 맛집이 우리를 향해 이리오시라 손짓하지만 아직 쉴 때가 아니니 지나쳐 간다. 숲속 모퉁이를 돌면 남인계 실학파이자 조선 후기 지성으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가가 있는 마재(馬峴) 마을의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으로 가는 찻길과 교차한다.
 
여기서 두 번째 신호등을 만나는데, 길을 건너면 사람과 자전거로 북적북적한 능내역이 우리를 기다린다. 팔당역으로부터 약 6km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왔으니 쉬어갈 타임이다. 팔당댐 건너를 보면 용마산과 검단산 녹음이 나란하다.
 
지금은 국토종주 자전거길의 쉼터로 재단장한 중앙선의 옛 간이역이다. 능내역의 간판과 건물에 작고 아담한 옛 정취가 묻어 있고, 역사 안에는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던 지역 주민들의 삶이 전시관으로 재현되어 있다.

* 족자섬과 두물머리 양수리 풍경
 

능내역 앞은 국토종주 자전거길에서 최대의 성황을 이루는 자전거의 메카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종류도 다양한 자전거를 빌려 타느라 인산인해(人山人海)고, 간이 먹거리를 파는 가게는 덤이다. 자전거 마니아가 아닌 나에겐 이 모든 상황이 큰 볼거리다. 하지만 나에게 감상에 젖을 수 있게 허락된 시간은 10분, 다시 일어나 길을 걷는다.
 
여기서 운길산 길을 따라 강을 건너며 보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양수리 족자섬과 너른 강 풍경이 장관이다. 멀리 남종, 퇴촌은 조선시대 왕실 백자를 굽던 곳이다. 이곳에는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포함된 〈독백탄〉 그림 현장이라는 표시판이 있다.
 
 
양수철교, 여러 직선이
한 점으로 모이는 추상화

따뜻한 봄날을 여유롭게 즐기며 걷던 그 길의 끝에 운길산역이 보이고 곧바로 양수철교를 만난다. 양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팔당댐 호수 위를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밴 녹슨 교각의 옛 양수철교가 시원스레 쭉 뻗는다. 철로는 사라지고 나무판자가 곱게 깔렸고, 자전거길과 사람길이 나란히 달린다. 행여라도 사람이 떨어질라 양옆으로는 높은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 시원한 팔당댐 호수 바람을 맞으며 건너는 멋진 양수철교
 

수십 개의 교각과 자전거길, 사람길, 안전펜스의 여러 직선이 한 점으로 모인다. 이보다 더 멋진 추상화가 또 있을까. 보는 순간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팔당댐 호수바람이 이마에 시원하게 부딪힌다. 서서히 한 점으로 모이는 추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전거가 다다다닥~ 획획 지나간다. 걷다가 타다가 잠시 멈춰 너도 나도 V자를 그리며 즐겁고 환한 웃음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누군가는 한 점으로 모아지는 다리를 배경으로 삼고, 누군가는 저 멀리 팔당댐 호수의 푸르른 두물머리를 바라보며 찍는다.
 
주변 강변을 훑으면 역시 운길산이 삼각형으로 잘생긴 주산이다. 운길산 정상에는 이 지역의 대표 사찰격인 수종사가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 풍경이 최고다.
 
중간쯤 건넜을까. 갑자기 물밑이 훤히 내려보인다. 까마득한 높이의 공포를 체험하며 스릴을 느끼라고 나무판자 사이에 강화유리를 둥글게 끼어 넣었다.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탈 줄은 알지만 결코 스릴의 즐거 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살짝 어지럼증을 선사한다.
 
철교 양 끝 다리 위에는 아담하고 멋진 카페가 있다. 혼자 갈 때도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능내역으로부터 겨우 4km밖에 걸어오지 않은 터라 꾹 참고 지나갔다. 여럿이 함께 갈 때는 아무리 먼 길 가는 게 우선이라지만 그 카페에서 추억을 담고 싶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함께 걷는 이들의 마음을 따른 덕분에 커피 한잔 느긋하게 마시며 확 트인 팔당호 한강물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선물 받더라.
 
 
진짜배기 육백 리 귀향길의 시작

옛 양수철교를 지나면 곧바로 양수역이다. 출발지인 팔당역에서 약 11km 2시간 반 거리인데, 점심을 먹기엔 좀 애매하다. 하지만 식사를 할 수 있는 다음 장소까지 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양수역에서 점심을 먹고 쉬어 가기로 한다.
 
양수역에서 국토종주 자전거길은 경의중앙선을 바짝 따라가는데, 그토록 북적대던 사람과 자전거가 갑자기 확 줄어든다. 자전거는 그래도 꽤 오가지만 사람은 아주 가끔 스칠 뿐이니, 이제부터 걷는 사람 만나기 힘든 진짜배기 육백 리 귀향길의 시작이다.

* 옛 철교에서 보는 운길산 풍경. 중앙선 새 철교가 위세롭게 강을 가로지른다
 

양수역에서 한 200m쯤 걸어갔을까. 저 앞쪽으로 용담아트터널이 보인다. 동네 이름인 용담에 아트라는 단어를 붙이니 뭔가 있어 보인다. 양수역으로부터 약 6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터널이라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와서 화려한 조명의 불빛 쇼를 체험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에게 600m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는지 다섯 번이나 이 터널을 지났음에도 북적대는 사람을 보거나 만난 적이 없다. 사람이 오지 않으니 자연스레 조명을 켜놓지 않아 화려한 불빛의 향연을 체험하지 못했다. 대신 천장에서 벽을 타고 졸졸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경의선 옛 터널의 정취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혹 내가 지나가지 않은 어느 날,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이 북적대며 오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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