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내역, 자전거의 메카
둑길 끝머리에 한옥으로 단장한 멋진 카페와 맛집이 우리를 향해 이리오시라 손짓하지만 아직 쉴 때가 아니니 지나쳐 간다. 숲속 모퉁이를 돌면 남인계 실학파이자 조선 후기 지성으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가가 있는 마재(馬峴) 마을의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으로 가는 찻길과 교차한다.
여기서 두 번째 신호등을 만나는데, 길을 건너면 사람과 자전거로 북적북적한 능내역이 우리를 기다린다. 팔당역으로부터 약 6km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왔으니 쉬어갈 타임이다. 팔당댐 건너를 보면 용마산과 검단산 녹음이 나란하다.
지금은 국토종주 자전거길의 쉼터로 재단장한 중앙선의 옛 간이역이다. 능내역의 간판과 건물에 작고 아담한 옛 정취가 묻어 있고, 역사 안에는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던 지역 주민들의 삶이 전시관으로 재현되어 있다.
능내역 앞은 국토종주 자전거길에서 최대의 성황을 이루는 자전거의 메카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종류도 다양한 자전거를 빌려 타느라 인산인해(人山人海)고, 간이 먹거리를 파는 가게는 덤이다. 자전거 마니아가 아닌 나에겐 이 모든 상황이 큰 볼거리다. 하지만 나에게 감상에 젖을 수 있게 허락된 시간은 10분, 다시 일어나 길을 걷는다.
여기서 운길산 길을 따라 강을 건너며 보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양수리 족자섬과 너른 강 풍경이 장관이다. 멀리 남종, 퇴촌은 조선시대 왕실 백자를 굽던 곳이다. 이곳에는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포함된 〈독백탄〉 그림 현장이라는 표시판이 있다.
양수철교, 여러 직선이
한 점으로 모이는 추상화
따뜻한 봄날을 여유롭게 즐기며 걷던 그 길의 끝에 운길산역이 보이고 곧바로 양수철교를 만난다. 양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팔당댐 호수 위를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밴 녹슨 교각의 옛 양수철교가 시원스레 쭉 뻗는다. 철로는 사라지고 나무판자가 곱게 깔렸고, 자전거길과 사람길이 나란히 달린다. 행여라도 사람이 떨어질라 양옆으로는 높은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수십 개의 교각과 자전거길, 사람길, 안전펜스의 여러 직선이 한 점으로 모인다. 이보다 더 멋진 추상화가 또 있을까. 보는 순간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팔당댐 호수바람이 이마에 시원하게 부딪힌다. 서서히 한 점으로 모이는 추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전거가 다다다닥~ 획획 지나간다. 걷다가 타다가 잠시 멈춰 너도 나도 V자를 그리며 즐겁고 환한 웃음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누군가는 한 점으로 모아지는 다리를 배경으로 삼고, 누군가는 저 멀리 팔당댐 호수의 푸르른 두물머리를 바라보며 찍는다.
주변 강변을 훑으면 역시 운길산이 삼각형으로 잘생긴 주산이다. 운길산 정상에는 이 지역의 대표 사찰격인 수종사가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 풍경이 최고다.
중간쯤 건넜을까. 갑자기 물밑이 훤히 내려보인다. 까마득한 높이의 공포를 체험하며 스릴을 느끼라고 나무판자 사이에 강화유리를 둥글게 끼어 넣었다.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탈 줄은 알지만 결코 스릴의 즐거 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살짝 어지럼증을 선사한다.
철교 양 끝 다리 위에는 아담하고 멋진 카페가 있다. 혼자 갈 때도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능내역으로부터 겨우 4km밖에 걸어오지 않은 터라 꾹 참고 지나갔다. 여럿이 함께 갈 때는 아무리 먼 길 가는 게 우선이라지만 그 카페에서 추억을 담고 싶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함께 걷는 이들의 마음을 따른 덕분에 커피 한잔 느긋하게 마시며 확 트인 팔당호 한강물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선물 받더라.
진짜배기 육백 리 귀향길의 시작
옛 양수철교를 지나면 곧바로 양수역이다. 출발지인 팔당역에서 약 11km 2시간 반 거리인데, 점심을 먹기엔 좀 애매하다. 하지만 식사를 할 수 있는 다음 장소까지 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양수역에서 점심을 먹고 쉬어 가기로 한다.
양수역에서 국토종주 자전거길은 경의중앙선을 바짝 따라가는데, 그토록 북적대던 사람과 자전거가 갑자기 확 줄어든다. 자전거는 그래도 꽤 오가지만 사람은 아주 가끔 스칠 뿐이니, 이제부터 걷는 사람 만나기 힘든 진짜배기 육백 리 귀향길의 시작이다.
양수역에서 한 200m쯤 걸어갔을까. 저 앞쪽으로 용담아트터널이 보인다. 동네 이름인 용담에 ‘아트’라는 단어를 붙이니 뭔가 있어 보인다. 양수역으로부터 약 6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터널이라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와서 화려한 조명의 불빛 쇼를 체험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에게 600m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는지 다섯 번이나 이 터널을 지났음에도 북적대는 사람을 보거나 만난 적이 없다. 사람이 오지 않으니 자연스레 조명을 켜놓지 않아 화려한 불빛의 향연을 체험하지 못했다. 대신 천장에서 벽을 타고 졸졸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경의선 옛 터널의 정취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혹 내가 지나가지 않은 어느 날,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이 북적대며 오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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