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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폐의 세계사>

01. 색채로 표현한 인간성의 존엄

by BOOKCAST 2020.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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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모든 지폐에는 저마다의 이야기와 온도, 색채와 생각이 담겨 있다. 지폐에 담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끊임없이 이어지며 지폐 특유의 온도를 자아낸다. 고난의 세월을 거치며 감정적인 색채가 더해진 지폐에는 마치 평온한 희열이 담겨 있는 듯하다.
 
몽롱하고 모호한 배경, 신비한 기운마저 떠도는 이색적인 색채,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 궁핍과 황폐가 뒤섞인 분위기가 마치 옅은 안개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림 속 인물을 둘러싸고 있다

 

고야의 작품 〈보르도의 우유 파는 아가씨>

 


마드리드에 위치한 프라도 미술관에는 보르도의 우유 파는 아가씨(1827)라는 제목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으슥한 구석에 전시돼 있어 많은 사람이 그림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다른 소장 작품에 비해 유명하지도 않지만 나는 매번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이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라는 이름은 아마 낯설 것이다. 분명 고야는 대중들이 쉽게 좋아할 만한 예술가는 아니다. 스페인 북부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담하고 열정적인 필치로 18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풍요로운 분위기를 그려냈다

 

 

 


결혼 후 고야는 처갓집 덕을 보고 있었는데, 서른 살 즈음 추천을 받아 마드리드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주된 일은 ‘Cartoons’라고 불리는 밑그림을 그리고 제작하는 것이었다.
 
고야가 밑그림을 완성하면 그것은 직공들에게 넘겨졌다. 그러면 직공들은 모직물에 밑그림을 정확하게 복제했다. 대다수의 태피스트리는 귀족과 서민의 일상생활을 풍부한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로 묘사한 것이었다.

1775년부터 1791년까지 고야는 스페인 황실을 위해 각지의 별궁에 적어도 63편의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18세기 스페인의 풍속과 민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예술 작품이 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1777년에 그린 파라솔이다.

 

 

고야의 작품 〈파라솔〉

 


이 그림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귀부인이 그려져 있다. 귀부인의 얼굴에는 매혹적이고 자긍심 넘치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 뒤에는 하인이 파라솔을 정중하게 들고 있다. 자신의 신체가 여주인에게 닿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친밀하면서도 소원한 주종관계를 의미한다. 이 작품은 강렬하고 풍성한 색감과 극적인 명암 대비로 스페인 귀족이 석양을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고야가 파라솔을 그린 시기에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자유, 민주, 평등을 외치는 정치 선언이 탄생했다. 또한 대영제국과 식민지 간의 전쟁은 들판에 불이 붙은 듯 빠르게 전개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귀족들은 여전히 향락과 즐거움이라는 오랜 꿈속에 빠져 있었다.

초기의 고야는 당시의 예술사조였던 로코코 양식의 섬세하고 나태한 아름다움에 미련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아름다움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흙먼지로 변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로부터 몇 년 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귀족적인 로코코 양식은 새로운 시대의 경멸과 비판, 유린을 당하게 되었다.
 
고야는 고상하고 풍요로운 묘사에 전념하면서도 인물의 눈빛을 통해 아쉬움과 연민을 영원히 남기려 했다. 마치 이어지는 순간에 그림 속 인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두 편의 작품 술 마시는 사내(1777) 도자기 파는 여인들(1779) 또한 고야가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하던 시기에 창작한 것이다. 술 마시는 사내에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술을 퍼마시는 남자와 도자기 파는 여인들에서 건초더미에 앉아 물건을 파는 부녀자들은 모두 평범한 서민들이었고 고야는 그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투영했다.
 
그들은 나라가 홀대하는 변두리 계층이기에 연약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고야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 서민의 일거수일투족은 고상하기는커녕 거칠었지만(그림 속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술을 마시거나 당근을 씹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 곳곳에서 원초적이고 왕성한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1949년 발행한 100페세타. 뒷면의 주제는 고야의 작품 〈도자기 파는 여인들〉이다.

 



 

 

1949년 발행한 1,000페세타. 뒷면의 주제는 고야의 작품 〈술 마시는 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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