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달걀 하나를 살 돈으로 몇 년 전에는 승용차를 살 수 있었다. 훗날 가격은 더 비상식적으로 상승했다. 듣자 하니 독일에서는 달걀 하나의 가격이 4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이는 과거 베를린의 모든 부동산 가격을 합한 액수와 거의 같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어제의 세계》라는 자서전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고달픈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특히 고정임금을 받는 계층의 피해가 심각했고, 지갑 속에 든 지폐는 하루아침에 벽지만도 못한 종잇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통화팽창지수에 따른 임금 조정 방식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발명된 것이다.
화폐 제도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신뢰’라는 심리적 기초 위에 세워진다. 지폐와 결혼증서는 모두 얇은 종이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는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의 가치는 한 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확고한 신뢰를 통해 생긴다. 즉 그것이 우리에게 재물이나 행복을 지불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뢰가 사라지면 화폐 제도와 사랑은 모두 붕괴될 운명에 처한다. 북송 시대 진종(眞宗)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성도(成都, 중국의 도시. 현재 쓰촨성의 성도(省都).)에서 양호한 신용을 가진 거상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자금을 출자해 종이 증서를 만들어 엽전을 대신했다. 파촉(巴蜀) 일대에서만 국지적으로 유통되던 지전을 《송회요》에서는 ‘교자(交子)’라고 불렀다. 발행기관은 ‘교자포(交子鋪)’(오늘날 지폐 발행 은행과 유사)였는데, 이로부터 지폐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교자가 발명된 초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양도와 교환이 가능한 예금증명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즉 반드시 귀금속 같은 담보가 있어야 비로소 동등한 가치의 태환권을 발행했다. 이것이 현대 지폐와 뚜렷이 다른 점이다.
시간이 흘러 계산 감각이 뛰어난 몇몇 교자포 경영자들은 현금을 빌려주었다가 회수할 때 원금에 이자를 붙여 받으면 약간의 수익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교자포의 경영 수익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투자 경제가 움직이게 되었다. 수준 높은 현대 경제학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화폐 창출’인 것이다.
이 기본적인 능력을 금융계에서는 ‘지급 준비금’이라 부른다. 만약 지급 준비금을 초과해 인출 요구가 일어나면 문제가 생긴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해 예금을 찾으려는 고객이 폭발적으로 몰려들면 은행은 반드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지폐가 발명되자마자 첫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초과 발행된 교자 때문에 교자포에서 예금주가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교자포는 도산했다. 《자치통감》은 이 사건을 ‘쟁료(爭鬧)’라고 불렀다. 당시 교자의 소유자는 평균적으로 액면가의 70퍼센트만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즉 교자 의 액면가가 1,000원이라면 700원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교자포가 미덥지 못한 기관처럼 보인다면 오늘날 은행이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라. 은행의 지급 준비율은 10퍼센트 정도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나라의 경우 은행의 지급 준비율을 2퍼센트로 설정돼 있다. 미국은 10퍼센트, 중국은 평균 20퍼센트다. 대만의 은행에서는 최고 지급 준비율을 25퍼센트로 설정하고 있다. 그 말은 고객이 예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몰려드는 경우, 어떤 은행도 예금액의 25퍼센트밖에 지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비교하면 교자포의 70퍼센트는 매우 믿을 만하고 성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쟁료가 벌어지자 성도에서 가장 부유한 열여섯 곳의 상점이 나서서 시장을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07년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 월 스트리트의 주식 거래 중단에 관여한 것과 비슷하다. 이후 이 열여섯 곳의 상점만이 교자를 발행할 수 있었고, 교자는 정식으로 통일되었다. 교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 열여섯 곳의 교자포에서 현금을 교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의미와 실질적인 기능을 지닌 은행권이 탄생했다. 이는 가장 오래된 지폐라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서 연합국은 독일에 전쟁배상금으로 2,690억 마르크를 요구했다. 비현실적인 액수에 독일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결국 몇 차례의 충돌과 조정, 협의를 거친 후 총 배상금은 1,320억 마르크까지 하향 조정됐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은 지폐 남발과 통화팽창으로 이어지며 독일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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