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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폐의 세계사>

02. 유행을 주도하는 혁신의 아름다움

by BOOKCAST 2020.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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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1965년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은 소매가 없는 모직 원피스 여섯 벌을 출시했다. 경쾌하고 시원한 재단 스타일에 검은 선과 원색 네모를 대담하게 사용한 원피스는 패션위크에 등장하자마자 프랑스판 보그(Vogue) 9월호 표지에 실렸다. 기하학을 활용한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이브 생 로랑은 패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생 로랑의 창작은 결코 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디자인은 네덜란드의 데 스틸(De Stijl) 및 데 스틸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회화 예술가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Composition in Red, Blue, and Yellow)은 몬드리안의 데 스틸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이 작품의 배경은 견고한 순백으로, 이는 다빈치의 회화 이념이 확대된 것이다. 백색은 작품에 깨끗하고 순수한 무대를 마련한다.
 
그 무대에서 화가는 검은색 물감을 사용해 수직과 수평으로 다양한 굵기의 선을 견실하게 표현했다. 비대칭적인 구조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이차원적 시각 공간이다. 그런 다음 네모 안을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으로 메워 고도의 논리성, 이상성을 지니면서도 극도로 추상적인 스타일의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켰다.
 
이처럼 난해한 회화 작품에는 몬드리안의 핵심적인 예술 개념이 담겨 있다. 그의 목표는 우주의 모든 만물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색채, 기하, 직선, 평면)로 변화시킨 다음,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만물의 유사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몬드리안은 모든 자연의 형상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연의 형상은 예술의 진정한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색채와 기하를 충분히 사용해 순수하고 수학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몬드리안은 데 스틸이 건축, 공업 및 패션디자인에 대량으로 응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데 스틸은 디자인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빨강과 파랑의 안락의자 및 슈뢰더 저택을 설계한 게리트 리트펠트(Gerrit Rietveld, 1888-1964), 암스테르담 시내의 국가전쟁기념패를 설계한 야코부스 오우트(Jacobus Oud, 1890-1963), 그리고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대표적이다.
 
데 스틸의 디자인 철학은 네덜란드 지폐의 미학적인 관점도 변화시켰다. 오랜 기간 네덜란드의 문화는 이성적이고 정확하다는 특색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사상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국제법 해양법의 아버지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 푸가의 선구자이자 파이프오르간의 대가 얀 스베일링크(Jan Pieterszoon Sweelinck, 1562-1621), 오리온 대성운과 토성의 고리를 발견한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 미생물학의 기초를 마련한 안토니 반 레이우엔훅(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 대표적인 이성주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임상의학과 현대 의학교육의 기초를 다진 헤르만 부르하버(Herman Boerhaave, 1668-1738) 등은 평생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확실히 해석하고자 했다. 렘브란트, 베르메르, 할스, 반 고흐, 에셔와 몬드리안 등의 화가들은 예술 창작을 통해 현상의 근원을 밝히려고 했다.
 
그럼 지폐는 어떨까. 1953년 네덜란드 중앙은행이 발행한 길더(Gulden) 시리즈에서는 모더니즘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소액인 10길더에서 거액인 1,000길더에 이르기까지 앞면은 모두 역사적 인물의 초상이고, 뒷면은 복잡하고 세밀한 구도를 통해 질서와 조화의 미를 드러낸다. 그러다 1966년부터 지폐 스타일에 대전환이 일어난다. 예술가 옥세나아르(Ootje Oxenaar)는 기업 이미지 통합 전략을 네덜란드 길더에 도입하고,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스타일을 결합해 전대미문의 지폐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이렇게 발행된 지폐는 심플해 보이지만, 지폐 역사상 인쇄 난도가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1953년 네덜란드가 발행한 20길더. 앞면의 인물은 부르하버다.

 

 

1953년 네덜란드가 발행한 100길더. 앞면의 인물은 에라스무스다.

 

 

1953년 네덜란드가 발행한 1,000길더. 앞면의 인물은 렘브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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