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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폐의 세계사>

04.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 꿈같은 번영

by BOOKCAST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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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꽃다운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조금씩 사라져 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술이 금방 사라져버리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준다는 점이다. 삶의 진실한 감정을 대신 남겨주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홀해지기 쉬운 미묘한 감정을 전달한다.
 
와인색, 자홍색, 빨간색, 연분홍색, 심홍색, 진홍색……. 진달래는 마치 들판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나는 꽃잎이 가득 떨어진 길을 밟으며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미무로토지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5,000엔 지폐 뒷면의 도안은 제비붓꽃이다.

 


교토 남쪽에 위치한 우지의 미무로토지는 꽃의 사원으로 유명하다. ‘마치 붉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은 봄날의 산 벚꽃, ‘신선이 거하는 곳에 있던 걸 옮겨 심은 것 같은 여름의 자양화, ‘서리를 맞았음에도 봄꽃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늦가을의 단풍, ‘메마르고 서늘한 새벽에 천 리를 비추는 겨울의 차가운 달빛. 시인들이 감흥을 토로한 풍아한 문체 속 미무로토지는 은은한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미무로토지에 가면 계절감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 외에도 우지 쥬죠(《겐지모노가타리》 중 우지를 배경으로 한 제10권.)·우키후네(《겐지모노가타리》의 등장인물.)라고 적 힌 고슈인(전국 시대 이후 무사들이 문서에 찍은 도장.)을 받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흘려 쓴 듯하지만, 글자의 배후에는 성공적인 연애와 천년의 번영이 숨어 있다.

 

 

우지 미무로토지의 ‘우지 쥬죠·우키 후네’ 고슈인. 일본만의 부드러움과 세련된 품격이 느껴진다.

 


교토의 박물관에서는 언제든지 고서(古書)나 종이에 쓰인 서예 작품을 볼 수 있다. 중국 송(), (), () 시대의 단정하고 엄격하며 또박또박한 해서체와 달리, 일본 고전문학에는 거의 대부분 부드럽고 세련되며 고도로 여성적인 초서체가 등장한다. 서적을 간행하는 사람들은 비록 중국처럼 정교하지는 못해도 또 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장정을 만들어냈다.
 
일본 고유의 서예법 류기는 헤이안 시대(784-1192)의 귀족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후지와라는 조정에서 가장 기세 높은 정치 가문이었다. 후지와라 가문은 야마토 조정 때부터 약 3세기에 걸쳐 일본의 정치, 문화, 경제, 종교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쿠게(조정에서 관직을 맡은 가문.)라 불리던 후지와라 가문에는 수많은 분파가 존재했는데 레이제이케’, ‘지묘인케’, ‘니조케’, ‘쿠조케 등의 분파는 각기 교토의 지방에 거주하며 명성을 떨쳤다.
 

 

일본 각지의 사원과 신사의 고슈인. 쿠게 문화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훗날 무사 세력이 대두하자 쿠게는 어쩔 수 없이 지위를 잃었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시가와 서도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출셋길이 막히자 그들은 오히려 섬세하고 비범한 쿠게 문화를 전개해나갔고, 이는 훗날 무사 세력이 집권한 막부 시대에 빛을 발했다. 레이제이케 분파는 가도(歌道)와 서도(書道), 후지와라 혹케 분파는 일본 고유의 정형시인 와카를, 와시노오케 분파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하는 가무(歌舞)인 가구라를, 후시미인케 분파는 황실 서법과 심지어 와비사비(일본의 미의식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소박하고 정적인 것을 가리킨다.)의 다도(茶道)를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교토에 있는 사찰 산젠인과 일본 황족의 별장인 가쓰라리큐의 야외 다실을 비롯해 일본 각지의 사원과 신사의 고슈인에서는 쿠게 문화의 깊은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쿠게 문화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건 11세기. 이야기의 무대는 번화한 헤이안쿄(교토의 다른 이름. 당시 일본의 수도.). 당시 궁정에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여성 작가 두 명이 출현했다. 한 사람은 마쿠라노소시를 쓴 세이쇼나곤이고, 또 다른 이는 겐지모노가타리를 쓴 무라사키 시키부다. 고관 명문가 출신의 무라사키 시키부는 원래 성이 후지와라로, 부친 후지와라노 다메토키와 형제 후지와라노 노부노리가 시키부노죠라는 관직(오늘날의 교육부 장관에 상당함)을 맡게 되면서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후지 시키부라고 불렀다. 그러다 훗날 겐지모노가타리의 여주인공 무라사키 노우에가 큰 인기를 얻자 후지 시키부는 무라사키 시키부로 불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겐지모노가타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겐지모노가타리》 제44권 ‘다케가와’

 


화가는 강렬하면서도 그윽한 색채로 인물의 형상을 두루마리에 정밀화로 그려냈다. 이러한 종류의 그림을 사쿠에라고 부르는데, 사쿠에는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매우 환영받았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는 헤이안 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예술 걸작으로, 도쿄의 고토 미술관과 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이 나누어 소장하고 있다. 소설에 비해 1세기 정도 늦게 등장한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는 고증에 따르면 전부 10권으로 추정된다. 겐지모노가타리 원작 총 54권을 각각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1~3폭 등장하기 때문에 총 그림 수는 약 90폭 정도 된다. ‘즈에 고토바가키라는 두 가지 형식을 이용해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표현했다.
 
박물관에 가서 수려하고 고상한 일본식 서예를 감상할 기회를 갖기란 사실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념으로 삼을 만큼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고슈인과 지폐를 수집할 수 있다. 지폐 위의 빛나는 필치와 화려한 선을 감상할 때 일본 고전 문학과 에마키 예술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감동을 줄 것이다.

 

 

(위) - 2000년에 발행된 2,000엔 기념 지폐의 뒷면. (아래) - 2,000엔 지폐 뒷면 도안의 원작.

 

 

(왼쪽)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에마키>에서 묘사한 헤이안 시대의 정치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찾아간 장면. (오른쪽) - 2,000엔 지폐의 부분 클로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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