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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룰루레몬 스토리>

01. 서핑, 스케이트보드, 그리고 스노보드 시대가 막을 내리다.

by BOOKCAST 2022.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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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비치 최후의 날

1995년이었다. 내가 경영하고 있던 웨스트비치 스노보드(Westbeach Snowboard)는 서핑, 스케이트보드, 스노보드 시장에서 16년을 버텼지만, 이 회사에서 얻어지는 수익으로는 주택 융자금 상환은커녕, 가족들 먹여 살리기도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스노보드를 즐기는 고객 규모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이들에게 보드 관련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들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당연히 이윤 창출은 난망했고, 웨스트비치의 위기는 커지고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의 생산 공장에 500만 달러어치의 스노보드 재킷 생산을 주문했는데 지퍼가 부족했다. 나는 급히 공급업체에 3만 달러어치의 지퍼를 외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모두 외상거래를 거절했다. 그전부터 쌓인 외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은행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했다. 은행은 우리 회사를 특별 관리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이 말은 우리 회사가 부도 직전 상황에 몰려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지퍼를 구매할 만한 자금이 필요했다. 정말 다급한 상황이었다. 의류 가운데서도 특히 계절의 흐름에 민감한 제품이기 때문에, 출고가 한 달이라도 늦어지면 파국을 피할 수 없다.

머컨타일 뱅콥(Mercantile Bancorp)이라는 사모펀드 회사가 재빨리 개입했다. 그들은 우리 회사 지분의 30%를 넘겨받는 대가로 지퍼 때문에 생겨난 위기를 해결하고도 남을 자금을 대주었다. 머컨타일 뱅콥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고, 투자를 한다면 회사가 살아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기는 하지만 회사 지분의 30%를 넘겨준다는 것은 과도한 거래 조건이기는 했다. 나는 다른 두 동업자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일했고, 항상 우리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머컨타일 뱅콥은 우리 세 명 대신에 자신들이 선임한 인물들로 이사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머컨타일 측은 블레어 뮬런(Blair Mullen)이라는 사람을 내 협상파트너로 내세웠다. 그는 회계시스템을 정비하고, 재고 관리 체계를 고쳐나갔다. 그는 처음부터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고, 나는 그의 업무 추진 방식을 존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우리 제품의 일본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도쿄 레반테(Tokyo Levante) 측에 우리의 신제품들을 선보이기 위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노르웨이로 가려고 할 무렵 블레어로부터 팩스를 받았다.

그 팩스에는 “제가 당신 회사의 CEO로 취임하기로 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나는 웨스트비치의 CEO 직함을 정식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CEO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설립한 회사이고, 핵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도 나였다. 나보다 높은 직책을 가진 상사도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내가 이 사업에 뛰어들어 성취해 내고 싶었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의 팀

나는 위기나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을 만나면 다른 사람들의 능력에 의구심이 많아, 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혼자서만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웨스트비치는 항상 생존의 위기와 위협 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반면 머컨타일은 우리의 여러 가지 약점을 찾아내 보강해 주고, 내 미숙한 경험으로 인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찾아내 해결해주었다.

3인의 동업자가 운영하는 우리 회사는 각자가 예산의 1/3을 책임지고 활용하여 각자 책임지고 있는 분야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관리하고, 회사를 차별화하고,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할 책임 있는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따로 없다면 회사는 그저 그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스트비치는 블레어를 CEO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웨스트비치를 창업한 지 15년, 세 명의 동업체제를 구축한 지는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경험 많은 CEO를 세웠고, 이사회를 통해 회사를 경영했고, 몇 개의 버티컬 리테일 스토어(vertical retail store)를운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버티컬 리테일 스토어란 의류 등 특정 카테고리 제품만 취급하는 소매 매장으로, 중간 유통 단계나 도매상을 배제하고 회사가 매장을 직접 소유하고, 회사의 책임 아래 운영되는 매장이다. 의류업계의 경우 버티컬 리테일 매장을 하면 중간 도매상을 통하는 것보다 두 배 정도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우리는 리테일 매장을 통한 판매와 중간 도매상을 통한 판매를 병행하고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영업은 부진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매출에서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투입할 여유 자금이 없었다.


스노보드 업계

그러는 동안 스노보드 시장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5년까지만 해도 스노보드 업계는 든든했고, 특히 일본 시장에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96년,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일본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의 해외 판매 수익의 30%를 차지했던 일본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임차료, 급여, 운영비 등 고정 비용의 부담이 컸다. 해외 매출의 30%가 사라지면 회사는 무너질 것이다.

과거의 서핑과 스케이트 시장이 그랬듯이, 몇 년 사이에 스노보드 생산도 대량생산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여러 건의 인수합병이 성사되었다. 소비자가 제품을 단지 상품으로만 바라보게 되면, 개별 제품의 독특한 개성보다는 단지 가격만으로 구매를 결정하게 된다. 대량생산으로 생산량이 많아지면 제품 1개당 생산 비용은 낮아지기 때문에 기업은 경쟁업체를 합병하거나 인수해서라도 단가를 낮추려 한다. 당시 스노보드 업계에서 상장된 기업은 내 동생이 중역으로 있는 라이드 스노보드(Ride Snowboards)와 모로우 스노보드(Morrow Snowboards) 뿐이었다. 두 회사는 일본의 대형 무역회사가 러시아의 유령회사를 내세워 뒷거래하는 것을 막아 자사 브랜드를 살리려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

상장기업인 라이드와 모로우는 일본에서의 매출 손실을 만회해 줄 수 있는 다른 회사를 인수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유지하여야 하고, 그러려면 더 높은 매출을 올려 분기마다 양호한 실적을 발표해야 했다.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우리 회사인 웨스트비치와 같은 다른 스노보드 의류 브랜드를 인수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매각을 고려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모로우와 인수합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돌연 모로우가 독자적으로 의류 브랜드를 만들고 생산라인을 설치하기로 하면서 논의는 끝났다.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모로우의 독자적인 의류 브랜드는 실패로 끝났다.


모로우와의 협상

웨스트비치는 여전히 세계 스노보드 의류 업계에서 인정받는 회사였기 때문에 얼마 후에 모로우는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왔다. 모로우는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우리는 절박했다. 그때가 월요일이었는데, 당시 우리는 돌아오는 금요일의 주급을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모로우는 웨스트비치의 높은 브랜드 가치를 고려해서 1,500만 달러에 우리를 인수하기로 했다. 이는 브랜드 가치라는 것이 누군가가 실제로 그 돈을 지불하기 전에는 제대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교훈이 될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모로우의 웨스트비치 인수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내가 일정 기간 동안 모로우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것과 본사를 오리건주 살렘(Salem)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합병된 기업의 조직문화를 지켜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로우에서 기획한 요가 그래픽 티셔츠가 일본 스노보더들에게 히트를 쳤다. 이 티셔츠의 성공 덕분에 그다음 해의 일본 스노보드 대회의 개막식에는 스노보드 위에서 요가를 하며 준비 운동을 하는 퍼포먼스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나는 8개월 만에 회사를 떠났다. 내가 모로우에서 맡은 일은 미래의 신사업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었는데, 나는 앞으로 스노보드용품과 의류에서 산악자전거 관련 용품으로 업종을 전환할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래 내가 모로우 측과 합의한 나의 의무 근무 기한은 12개월이었으나 실제로는 8개월 만인 1997년 12월로 마무리되었다. 모로우에서의 내 역할은 그렇게 끝났다.


나의 18년간의 MBA

나는 공식적으로 실업자가 되었다. 머컨타일과 은행이 매각대금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챙겨가고 남은 자금으로 모든 부채를 해결하고, 우리 세 명의 동업자들은 약 100만 달러씩 나눠 가졌다. (세금을 제하면 80만 달러 정도였다) 그동안 쉼 없이 일하고 여러 곳에 출장을 다니면서 나의 몸과 마음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데 꽤 많은 현금을 손에 쥐게 되고 나니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안도감과 몸과 마음의 넉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웨스트비치는 수익을 내지 못했다. 두 곳의 버티컬 리테일 매장에서 매년 1백만 달러 정도의 수익이 났지만, 해외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1백만 달러의 손실이 나왔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수십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 내가 다음 벤처 사업을 순수한 버티컬 리테일 매장 체제로 펼친 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 귀중한 경험 때문에 나는 웨스트비치를 경영하던 시절을 ‘18년간의 MBA’ 기간이라고 부른다. 회사를 떠나면서 손에 쥐게 된 80만 달러의 거금보다 훨씬 가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말고도 웨스트비치의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하면서 여러 차례 그곳을 여행하면서 얻은 경험도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처음 의류 사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원단이나 생산 또는 영업 경험이 거의 없었고, 경영자로서의 경험도 전무했다. 자금조달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고, 협상능력이 탁월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처럼 체육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대학을 다녔으니 비즈니스 분야는 정말 낯선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람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도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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