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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룰루레몬 스토리>

04. 사업에 눈을 뜨다.

by BOOKCAST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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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영점의 발견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들은 내가 8번가 몰 옥외에 레모네이드 스타일의 가판대를 차리고 조촐하게 판매를 시작한 것은 큰 실수라고 말했다. 또 의류 사업은 어려운 분야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간단해 보였다. 원단을 구입하고, 옷의 생산 과정을 점검했다. 생산된 옷은 신디가 지키고 있는 가판대에 갖다주었지만, 신디가 자리를 비울 때는 내가 직접 판매했다.
그것이 버티컬 리테일을 학습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다.

버티컬 리테일 매장을 운영하면 이익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그러나 비교할 만한 버티컬 리테일 매장의 모델이 없었다. 상품을 공급해 주고 60일이 지나서 판매대금을 거둬들이는 홀세일(wholesale) 방식과는 달리, 매일 판매되는 대로 그날그날 현금이 들어왔다.


경제학을 전공하며 갖게 된 지식이 유용하게 쓰였다. 수익성을 높이려면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여 대량생산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학교에서 배운 바 있다. 우리 제품도 디자인 당 최소 500벌, 보통 2천 벌 정도를 생산해 내지 않으면, 이익을 낼 수 있을 만큼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없었다. 사업이 기반을 잡고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당장 얼마를 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하튼 비즈니스에 대한 많은 것을 실전을 통해 새로 배우던 시기였다. 인생에서 실행이 없다면 성과도 없다.


재정적 어려움

1980년, 우리 사업의 첫 여름이 끝날 무렵, 신디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해서 건축을 전공했다. 나는 겨울에는 가판대를 닫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우리는 그 시즌에 5,500달러 정도 벌었다.

나는 다음 시즌 제작을 위해 2만 달러어치 원단을 사야 했다. 나는 계속 돔 석유 회사에서 번 돈을 웨스트비치에 투입하고 있었다. 원단 구매에 돈을 다 써버리면 재봉 단계의 인건비를 지불할 수 없을 것이다. 웨스트비치의 첫 번째 해결 과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조세핀 테라티아노에 가서 상품이 다 팔리면 이듬해 여름에나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데 겨울에 재봉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런 부탁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조세핀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서로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신뢰하고 있었고, 가족 같은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운 부탁인 것은 사실이다. 오로지 공식 계약을 통해서만 작동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적이고 인간적인 유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요청이었다.

조세핀의 입장에서는 원단을 두 배로 구입하면 자신의 일감도 늘어나기 때문에 나름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임금의 부담이 없는 만큼 원단을 두 배 구입할 수 있으니 비록 몇 개월 후 후불로 받기는 하지만 수입도 두 배로 늘어난다. 궁극적으로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겨울로 접어들었고, 나는 돔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다. 돔 타워 30층에 앉아서 일하면서 수백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동안, 아직은 사업 규모가 작은 웨스트비치는 겨울 동안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돔은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30살까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하고, 40살에는 은퇴를 한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돔에서 계속 근무하면 내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부회장쯤까지 승진할 것이고,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것이고, 교외로 이사할 것이고, 60살쯤 은퇴를 할 것이다. 평생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듯 거의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내 안의 내가 말했다. “칩, 생각해 봐. 인생은 한 번뿐이야.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 인생을 새롭게 살아봐.” 나는 그 순간 1만 5천 일쯤의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에 경제 공황기를 겪은 어머니는 항상 염려하셨다. “칩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하는 게 두려웠어요. 사업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걱정되지요. 그러나 사업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았겠지요. 하여튼 정유 업계에서 일하던 사람이 의류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지요.”

반면 아버지의 말씀은 명쾌했다. “나는 칩이 돔에서의 직장 생활을 지루해할 줄 알았어요. 그건 칩이 원하던 길이 아니거든요.”

웨스트비치를 경영하면서 나는 매일 새로운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도전의 연속이었고, 그 가운데 항상 무언가를 배웠다. 물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무얼 배우게 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반면 돔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의 사업을 위해 급여를 받고 일한다면,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고, 직급과 근무 성과와 연차를 고려해 승진하는 예측 가능한 미래가 펼쳐질 것은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돔 석유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큰 파산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상누각같이 엉성한 기업이었다. 나는 회사가 급성장하던 시기에 2년 반을, 부도가 난 후 은행의 관리를 받을 때 2년 반을 근무하면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그 또한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절대로 은행 빚을 지지 말고, 은행의 관리를 받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나는 은행과 기업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 문구를 좋아한다.
“은행으로부터 2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갚지 않는다면 당신은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한다. 그러나 당신이 은행으로부터 200억 달라의 빚을 지고 갚지 못한다면 은행이 곤경에 빠진다.”


사업 2년째

1981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웨스트비치는 사업 규모를 조금 키웠다. 캘거리의 다른 곳에 가판대를 하나 더 설치하고, 에드먼턴(Edmonton)에 할인 매장을 하나 냈다. (이것이 훗날 룰루레몬의 특유의 팝업스토어의 시초이다.) 스키 매장은 여름에는 영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웨스트비치처럼 계절을 타며 여름 장사를 주로 하는 소매점으로 활용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가판대는 탈의실이 없기 때문에 고객들은 입어보지도 않고 구입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앞으로 사업이 좀 더 성장하려면 탈의실을 갖춘 매장이 필요할 것이다. 수요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웨스트비치가 성장 중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아직 임계점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파트너는 이 신념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1981년 여름이 끝나고 신디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고,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제 또 한 해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될 참이었다. 당시는 손쉽게 연락할 수 있는 이메일이나 인터넷은 없던 시절이었다. 장거리 전화는 가능했지만, 비쌌기 때문에 계속 시간에 쫓기며 대화를 해야 했다. 우편은 당시에도 너무 느리고 구식이었다.

신디도 나도 각자 성장할 영역이 달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사업적 관계는 물론 개인적인 관계도 청산했다. 함께 일하면서도 신디는 회계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웨스트비치가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대출로 인해 2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업 3년째

신디와 고통스러운 작별 후에도 웨스트비치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믿음은 확고했다. 이 일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나는 서부 태평양 연안 지역에 유럽이나 동부 대서양 연안과는 사뭇 다른 스포츠 문화가 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스타일은 후디(hoodie)라는 용어 설명될 수 있었다.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사람들의 패션 스타일의 시초이다. 라이프스타일 의류(lifestyle clothing)라는 용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때이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묘사하는 ‘익스트림’이라는 용어도 없을 때였다.

1982년 여름에 나는 마침내 정식 웨스트비치 매장을 열었다. 원래 이 매장은 70년대에는 더 스트로베리 엑스페리먼트(The Strawberry Experiment)라는 이름의 고급 히피 매장이었다. 캘거리 시내의 우리 가판대에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유명한 매장이었다. 이 매장의 이전 주인은 유리 바닥 밑으로 수족관을 설치하고, 현란한 조명과 털이 풍성한 카펫을 까는 등 매장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었다. 나는 고객들이 다른 의류 매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느끼도록 이곳만의 복고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보기로 했다.

멕시코 시티를 여행을 하면서 나는 아름다운 의류들을 판매하는 할인 매장에 갔었다. 5천 달러 상당의 옷을 구입해 캘거리로 가져가서 팔았더니 바로 동이 났다. 나는 다시 가서 1만 5천 달러어치의 옷을 샀고 그것도 모두 팔았다. 세 번째로 갔더니 그 매장은 닫혀 있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그때 내가 샀던 제품은 당시에는 신생 브랜드였지만, 훗날 엄청난 브랜드로 성장한 게스(Guess)였다. 당시에는 캐나다나 미국에서는 게스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물건이 불티나게 팔린 것은 그만큼 여성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보는 남다른 안목이 있어서 일 것이다. 게스는 우리 사업 초창기에 고객을 끌어들이는 좋은 상품이었다.

나는 캐시(Kathy)와 케이시(Cathy) 두 여성을 채용했다. 판매와 매장 관리를 위해서였다. 내가 그들을 처음 본 것은 그들이 캘거리 최초의 카푸치노 카페인 베이글스 앤 번스(Bagels & Buns)에서 일할 때였다. 그 카페는 1940년대에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이곳에서 신문을 읽으며 캘거리에서는 유일한 카푸치노를 마시곤 했다. 카운터에서 일하는 캐시와 케이시가 아주 요령 있게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는데, 정말 매력적인 감동을 주었다. 책임감 있고, 똑똑하고, 의욕이 넘쳤고, 고객 응대가 훌륭해 보였다. 캐시와 케이시는 웨스트비치의 새로운 매장에 딱 맞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고용한 것은 면접, 교육, 인력계발 등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도 경영자로서 잘 훈련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전수해 줄 만한 비즈니스 철학이나 노하우도 없었다. 직영점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를 배울 만한 책도 없었다. 사실 도매 방식의 영업이 각종 간접비와 여러 가지 운영비를 줄일 수 있는 훨씬 ‘안전한’ 영업 방식이었다.

내가 돔에서 몇 개월 동안 친하게 지냈던 스콧 시블리도 나의 도매 영업 파트너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년 전에 밴쿠버에서 리처드 멜론(Richard Mellon)이라는 사람과 새로운 사업을 한다며 돔에 사표를 던지고 떠났다. 스콧은 그때를 회상하며 “저는 내 열정을 쫓아서 요트 사업을 시작하려고 서부 해안지방으로 떠났지요.”라고 말했다.

스콧과 리처드는 소형 요트 사업을 벌였지만 신통치 않았다. 부품 시장은 본격적인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스콧은 말했다. “회사의 현금 흐름의 숨통을 틔우려고 섬유 제품을 찾아봤어요. 칩의 덕을 크게 봤죠. 칩은 우리를 통해 쇼츠와 티셔츠를 위탁판매 했어요.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주력 사업이 되면서 매장 이름도 ‘캘리포니아BC’로 바꿨어요.”

밴쿠버에서는 그곳대로 웨스트비치 의류에 대한 큰 수요가 있었고, ‘캘리포니아BC’는 나의 가장 큰 도매 고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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