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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룰루레몬 스토리>

03. ‘와인처럼 근사한’

by BOOKCAST 202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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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마치며

1976년, 경영대학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나니 교수님들은 내게 경영대학이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실제로 나는 회계학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학교생활이 너무 피곤해서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과목들만 골라 들으려고 노력했다. 전공은 경제학이었고 회계학 때문에 골치 아프기는 했지만 다른 과목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나는 우수한 경영대 학생이었고, 경제학은 예술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결코 정답이 있을 수 없는 과목이지만 나는 괜찮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경제학은 상대적으로 내 방식을 고집하기 쉬웠다. 나는 가장 쉬운 것이 가장 큰 성취감을 주기 때문에, 인생에서 누구나 쉬운 과정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캘거리대학교(University of Calgary)로 편입한 후, 나는 풋볼 선수로서의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내가 중간 정도 수준이었던 스포츠), 레슬링(아주 형편없지만)과 수영선수(계주팀에서만)로도 활동했다. 1979년에는 지역 프로 풋볼팀에 입단했지만, 장거리 수영선수로 활동하기 위해 체중을 115kg에서 95kg로 줄이고 2주 만에 그만두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7년 만인 1979년, 나는 대학을 졸업하며 경제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알래스카에서 번 돈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는 돈을 써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세계여행 경험이 많은 젊은이

나는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항공권을 매년 5장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 혜택을 십분 활용했다. 항공권은 무료였지만 여행 때마다 많은 돈을 썼다.

내가 20대 초반에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가는 도중에 경유지인 브라질 리오에서 4시간 동안 머물 수 있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린 지 한 시간 만에 케이프타운은 얼마든지 나중에 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리오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날이 새해 전날인 것도 한몫했다. 코파카바나(Copacabana)나 이파네마(Ipanema)라는 지명은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최고로 차려입고 멋을 낸 브라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틴 문화의 정열과 적극적인 표현에 매료되었다. 북미의 보수적인 고장에서 온 나에게 리오는 정말 특별했다.

바베이도스도 갔었다. 마지막 시험을 마친 다음 날 비행기를 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 모든 여행에서 세상이 참 좁다는 것을 배웠다. 비행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바베이도스에서 4일째 되던 날 새벽 3시 무렵이었다. 나는 ‘알렉산드리아스’라는 디스코 클럽에 있었다. 술을 몇 잔 마신 뒤 주변을 둘러보니 아버지를 많이 닮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정말 도플갱어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다가가 “혹시 아버지?”라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맞다”라고 말하고 다음 날 서핑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도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누가 카리브해의 디스코클럽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겠는가? 우리는 각자의 계획대로 시간을 보냈다. 어쨌든 그 순간은 정말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

1979년 말쯤, 나는 대학 생활이 끝났고, 항공사로부터 받던 공짜 여행 혜택도 끝났다. 은행에는 8만 5천 달러가 남아 있었고, 나는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랩 쇼츠

과거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캘리포니아에서 답을 찾았다.
1979년 가을, 샌디에이고에 사시는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나는 오션 퍼시픽(Ocean Pacific)이 스트리트 스타일의 코르덴 재질의 서핑 쇼츠와 서핑을 하지 않을 때 입을 만한 후드티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또 젊은 여성들이 끈의 한쪽을 묶고 아래로 늘여 다시 뒤에서 묶는 랩 쇼츠(Wrap shorts; 장식용으로 묶는 끈이 달린 쇼츠)를 입은 것을 보았다. 색상과 패턴은 밝고 대담했고, 사파리나 하와이 스타일의 무늬도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하시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며 자라서 바느질이나 재단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쇼츠가 얼마나 편안하고 기능적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매년 캘리포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유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캘리포니아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유행이 결국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패션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캘거리로 돌아가면서 여자 친구인 신디 윌슨(Cindy Wilson, 성은 나와 같으나 아무 관계가 없다)에게 줄 선물로 쇼츠 두어 벌을 샀다.

돌아와서 그녀에게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하는 쇼츠를 보여주니 아주 좋아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쇼츠의 상품성을 알려주는 첫 번째 긍정적인 신호였다.

처음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패턴도 간단해 보였고, 신디와 나는 어머니로부터 옷감 대신 신문지를 이용해서 패턴을 만드는 법과 간단한 재봉 방식 몇 가지를 배웠다. 그러나 내가 나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패턴을 자른 뒤 바느질을 해보았지만, 사람들이 입고 싶을 만한 옷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간단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재봉 솜씨를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만큼 훌륭한 재봉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돈도 벌고 싶어 하는 괜찮은 재봉사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신문에 구인광고를 냈고, 몇몇 여성들이 지원했다. 한껏 고무되었지만 나는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면 100%의 원단에 화려한 꽃무늬나 대담한 디자인이 인쇄된 옷감을 지원한 재봉사들에게 전달하며, 그들에게 랩 쇼츠 10벌씩 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를 기준으로 작업 숙련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 5명을 추려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다른 네 명보다 아주 탁월했다. 그녀의 이름은 조세핀 테라티아노(Josephine Terratiano)였다. 아주 뛰어난 이탈리아계 여성이었던 조세핀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모두 숙련된 여성복 재봉사였던 친척들과 함께 내 작업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훗날 내가 이탈리아 인맥을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무렵 어머니와 어머니의 새 남편, 그리고 내 여동생과 남동생은 모두 미국으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빅수르 에살렌 연구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테라티아노 일가는 나에게 두 번째 가족과 같았다. 조세핀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어머니도 재봉사였고, 여동생들도 재봉사였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그것뿐이었지요.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재봉을 했어요. 그리고 칩, 그가 운 좋게도 나를 찾아주었어요!”

나는 조세핀과 그녀의 자매들의 도움으로 쇼츠 300벌을 제작했고, 송유관 현장 시절, 멘토처럼 가깝게 지냈던 빌리 오캘러한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파인 애즈 와인(Fine as Wine: 와인처럼 근사한이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그 물량은 신디의 친구들을 통해 판매하는 한편, 캘거리의 좀 규모가 있는 백화점들을 찾아가서 이 쇼츠 판매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느 백화점도 이 쇼츠가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은 거의 재고로 남았다. 처음으로 재고관리의 문제에 눈을 뜬 것이다. 상품은 많은데 판매할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면 그들의 생각은 다를 것으로 생각했다. 남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서핑 의류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얻은 영감에 의지하여 그곳에서 차량으로 12시간이나 떨어져 있고, 해발고도도 1,000m나 되는 곳에 사는 도시에서 고객을 모으는 문제였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들고 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이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뭔가 특별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나는 가장 기본적인 판매 방법인 레모네이드 가판대 말고는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캘거리 시내에 여름 3개월 동안 장소 사용료를 내고 근사한 목조가판대를 설치해 놓고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이것은 재고 소진 계획인 동시에 내 평생 처음으로 직영매장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이기도 했다. 신디는 일주일 걸려 목조가판대를 만들었고, 주말이면 쇼츠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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