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경영/<룰루레몬 스토리>

05. 동업하다.

by BOOKCAST 2022. 6. 21.
반응형

 


 

돔을 떠나다

1985년 4월 25일, 나는 30번째 생일 전에 달성하기로 했던 목표를 이뤘다. 돔 정유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목표가 아직 하나 있다. 40세에 은퇴하는 것이다.

40살에 은퇴하려면 웨스트비치를 좀 더 키워야 했다. 한해 전부터 사업의 중심이 서핑에서 스케이트보드로 옮겨진 것은 분명해졌다. 스케이트보드 시장은 과거 서핑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수십억 달러의 규모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변화의 흐름을 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류의 스타일 별로 500~2,000벌 정도를 생산해야 생산단가도 낮출 수 있고, 이윤도 발생할 수 있다. 당시 우리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하밀스 서핑샵(Hamill's Surf Shop)과 밴쿠버에 있는 스콧 시블리와 리처드 멜론의 매장을 포함해 북미 전역의 여러 개의 거래처를 통해 위탁 판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 규모는 만족할 만큼 크지 않았다.

사업 규모를 급속도로 키우기 위한 노력의 사례들 가운데 하나는 1985년에 싱가포르에서 열린 무역박람회에 참가한 것이었다. 일본의 대형 백화점에서 온 바이어들이 우리 부스를 방문했고 그들은 우리의 뒤집어서 입을 수도 있는 기장이 좀 긴 퀼트 쇼츠 제품이 다른 회사 제품과는 차별화된 제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약삭빠르게 그들의 이름으로 웨스트비치라는 상표를 등록해 버린 것이다. 내가 상표와 저작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경험 미숙의 결과이다.


스콧 그리고 리처드와의 동업

나는 동업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함께 할 파트너가 없다면 머지않아 스케이트보드가 크게 유행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돈과 전문성을 갖춘 누군가로부터 추월을 당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스콧과 리처드 측은 매장에 비치할 옷을 계속해서 대규모로 주문하고 있었다. 1985년 여름,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일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동업을 하다 보면, 사업에 성공하려면 야심 있는 사업가들이 각자 다른 전문성을 어떻게 조합하고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창의적인 비전을 가지고 사업 전체의 얼개를 짤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조직을 관리하고 회계를 책임질 수 있는 조직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도 필요하다.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갖출 수는 없다.

나는 스콧과 리처드와 힘을 합친다면 각자가 가진 다른 전문성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스콧은 영업과 사람을 다루는 재능이 있고, 리처드는 독창적인 사람이지만, 우리가 겨냥하는 고객의 연령층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다. 그러므로 그가 서류나 문서 작업이나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맡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상품 개발, 제품 디자인, 생산 등을 책임지면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들과의 동업을 생각하게 된 것은 사업을 확장한다는 것이 나 혼자의 능력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지불채권, 수취채권, 그리고 인보이스(Invoice) 등을 작성하는 법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반면 나는 결제조건이나 자금 조달 따위의 일들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이전에는 누군가가 내게 인보이스를 보내면 5일 안에 지불했다. 지급 만기일이 30일가량 남았는데도 말이다. 리처드의 시각으로 보면 인보이스를 받고 나서 만기일까지 25일간 그 돈을 활용할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리처드는 물류센터 설립이나 배송 등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많았다. 나로서는 힘겨운 일을 그는 척척해냈다. (훗날 나는 인보이스를 받고 5일 만에 자금을 결제해 주는 것이 버티컬 리테일 매장에서는 반드시 잘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급업체들은 내가 자금을 신속하게 결재해 주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다. 내가 그들로부터 새로운 상품 정보나 기술 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나를 최상급 거래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나의 동업자가 될 사람들은 내게서 공급받는 옷들이 스포츠 장비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와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웨스트비치에서 생산한 옷과 다른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공급받아 팔고 있었다.

동업 관계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내가 누리던 이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장차 크게 유행할 서핑과 스케이트보드 업계의 선두주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1985년 9월, 나는 내 사업 지분의 66%를 리처드와 스콧에게 매각했고, 우리는 정식으로 동업자가 되었다. 웨스트비치는 이제 개인 사업체가 아니라 미국 서부 해안의 어엿한 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창기에 우리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는데, 사업 형태를 바꾼 덕도 컸다.

“우리는 원래 직영매장 중심으로 영업을 했지만, 도매 부문 영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칩은 캘리포니아의 자기 매장에 물건을 채워 넣는 것에 익숙했지만, 우리가 가세하면서부터는 캐나다 시장을 겨냥해 도매 형태로 물건을 유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서핑 의류 시장이 미친 듯이 성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라고 스콧은 회상했다.

그해 가을, 우리는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의류 관련 무역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80년대에 북미 동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에서 열린 무역박람회의 분위기는 좀 이상했다. 각 회사의 부스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남성 영업 담당자들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판매하는 옷에서는 항상 담배 냄새가 났다. 동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에는 흔한 풍경이었지만, 나로서는 질색할 만한 모습이었다. 운동복을 팔겠다는 사람이 양복을 입고, 담배까지 피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사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폭스바겐 스포츠카를 타고 박람회장에 나타났다. 쇼츠와 티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서핑보드와 스케이트보드를 팔았다. 빠른 템포의 메탈 음악을 들으며 상대방과 사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는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은 문화와 마케팅 방식으로 우리 브랜드를 선보인 것이다. 스포츠용품 업계가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후 몇 년 동안 매년 몇 차례씩 일본, 라스베이거스, 뮌헨 등에서 열리는 무역박람회에 참가했다. 우리 물건을 유통해 줄 도매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내가 직영점의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훨씬 이전이다. 두 파트너와 동업을 시작한 후에도 규모의 경제에 맞는 대량생산을 가능하도록 하려면 도매 유통망을 늘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처럼 보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객을 기하급수적으로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박람회는 즐거웠고, 결과도 좋았다. 동업을 시작하자마자 긍정적인 신호를 느낀 것이다. 나는 장차 우리가 재정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잘 모르고 있었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웨스트비치는 부채를 안고 있었다.


채무와 신용

동업을 시작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부채 없는 경영을 선호했다. 은행에 의해 회사가 휘둘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동업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가진 비상금까지 모두 끌어모아 빚을 모두 갚았다.

나는 내 두 파트너가 그들이 경영하던 윈드리프트 디자인(Windlift Design)에서 진 빚을 안고 동업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합병하고 나니 그들의 회사의 빚이 고스란히 합병하여 통합된 웨스트비치가 갚아야 할 부채가 되었다.

그들과 동업하더라도 나에게는 부채가 없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나는 은행이 내 회사에 이래라저래라 말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리처드와 스콧과 동업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 비상금을 가져다가 빚을 다 갚았다. 부채를 즉시 청산하기 위해 회사는 동업자인 리처드에게 이자를 내면서 돈을 빌렸다.

부채 상환 고민이나 사업 성장에 필요한 자본 부족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부채로 인한 정신적인 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의 40~50%는 자금 이야기인 것 같았다.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자금이 부족한데 어떻게 경영해야 할지 등 온통 돈 이야기뿐이었다. 영혼을 갉아먹는 돈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창의적이었을지 궁금하다.

이후 몇 년 동안 웨스트비치는 적자에 시달릴 것이다. 우리의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신용한도를 지키는 것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신용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우리가 캐나다 판매 라이선스를 받고 물건을 공급받는 캘리포니아의 회사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그랬다.

안타깝게도 이후 10년 동안 웨스트비치에서 보낸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이 부채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항상 촌각을 다투어가며 싸웠고 신용 한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기 직전의 상황까지 이어졌다.


토론토 시장 개척

어쨌든 우리는 보다 넓은 지역으로 판매망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밴쿠버에는 웨스트비치의 대표매장이 있었고, 나는 캘거리에서 토론토로 이주했다. 캐나다 인구의 70%가 동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동부에 기반을 탄탄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용은 캘거리의 집을 활용해서 충당했다. 대신 나는 스스로 파멸의 지하감옥(the dungeon of doom)이라고 불렀던 아직 완성도 안 된 매장의 지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돈을 아꼈다. 토론토의 더 비치(The Beach) 지역은 유달리 이웃 간의 유대가 긴밀한 지역이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나를 품어 주었다. 나도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좋았다.

토론토 매장의 매출은 이 지역의 떠오르는 인기 스포츠인 비치발리볼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금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동부 지역에 진출하면서 계획했던 만큼 성장을 할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도매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계속 느꼈다. 스콧은 이렇게 말했다. “초창기에 회사가 크게 성장하려면 도매 방식 영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습니다. 직영매장을 짓겠다고 하면 은행에서는 자금을 융통해 주지 않았습니다. 은행도 직영점 영업에 관한 충분한 데이터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금지원을 회피했습니다.” 나는 요즘 막 붐을 이루는 이커머스 업체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을지 상상해 본다.

“자금만 충분하다면 직영매장을 많이 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매우 위험해 보였습니다. 룰루레몬의 성공은 특별한 케이스였습니다. 룰루레몬은 직영매장 중심의 영업이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지요. 그러나 웨스트비치 시절 우리는 직영 매장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도매유통에 투자할 돈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스콧은 말했다.

1987년 무렵 우리는 내가 토론토에 머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토론토에 있다고 해서 웨스트비치에 크게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두 동업자와의 관계는 장거리 연애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우리는 토론토의 직영 매장을 비치발리볼 디자이너인 프레드 쿱스(Fred Koops)에게 팔았다. 그는 오버킬(Overkill)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밴쿠버의 재발견

나는 다시 밴쿠버로 돌아와 스콧과 리처드와 합류했다. 그들은 포인트 그레이로드(Point Grey Road)에 있는 방 5개 딸린 집에서 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거리는 잉글리시 베이(English Bay) 남쪽 해안을 따라 나 있었고 그 훗날 세계에서 부동산값이 가장 비싼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파란 하늘과 대양 위를 떠가는 화물선, 그리고 손에 잡힐 것 같은 눈 덮인 산을 보면서 눈을 떴다. 하루에 서핑과 스키, 그리고 요트를 모두 즐길 수 있었다. 정말로 평생 살고 싶을 만큼 멋진 장소였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풍경에 취해 눈을 뜨면서 50살까지 밴쿠버 해안에 있는 저택을 소유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동업하며 경영하는 웨스트비치의 초창기 일은 매일매일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이미 밴쿠버에 푹 빠져 있었다. 그곳으로 이주한 것은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캘거리와 시애틀, 그리고 인스부르크에 매장을 냈고, 몇 년 후 휘슬러에도 매장이 생겼다. 각 매장에는 3~4명의 직원이 있었고 연간 수익은 백만 달러가 약간 넘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수입이었지만 현금 유통이 원활하지 않은 도매 중심 영업으로 인해 빚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었다.

반응형

'경제·경영 > <룰루레몬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 룰루레몬의 탄생  (2) 2022.06.23
06.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1) 2022.06.22
04. 사업에 눈을 뜨다.  (2) 2022.06.20
03. ‘와인처럼 근사한’  (1) 2022.06.17
02. 19살에 집을 사다.  (1) 2022.06.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