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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룰루레몬 스토리>

02. 19살에 집을 사다.

by BOOKCAST 2022.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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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내가 운동 말고는 다른 일에 별로 열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캘거리에서 돌아오는 에드먼턴 공항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야. 남편이 알래스카 유전 송유관 5개 구역 중 하나의 프로젝트 관리자란다. 네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유감이다.”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네가 미국인이고 원하기만 한다면 거기서 일할 수 있는데 말이야.”

알래스카 송유관은 길이 800마일의 강철관으로 미국의 마지막 불모지의 심장부를 관통한다. 그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싼 민간 건설 공사 중 하나였다. 내가 이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었고, 친구의 어머니는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미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자이다.

대학 2학년을 마치던 날, 나는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페어뱅크스(Fairbanks)의 미국 세관을 지났고 미국 국경 담당관에게 내가 캐나다인이라고 말했다. 담당관은 내 가방을 검사했다. 가방 안에는 온통 건설 작업복, 안전 장화 등과 같은 것들뿐이었다.

“당신이 여기서 일하면 미국인의 일자리가 줄어듭니다. 입국을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문제였다. 나는 돌아갈 항공권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중국적자이다. 그래서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담당관에게 내가 미국 국적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좋아요. 이쪽으로 건너가세요.” 담당관은 말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국경선을 넘어 미국 영토로 들어갔다. 그는 “내일 아침 가장 먼저 징집위원회에 신고하세요.”라고 덧붙였다.

“맙소사.” 내가 처음에 국경 담당관에게 캐나다 여권을 제시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당시는 베트남전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70년대 중반이었다. 징집위원회에 신고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

얼마 후, 나는 송유관 공사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좀 흐르자 혹한이 왔지만 고된 노동을 계속했다. 200명에서 800명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을 위한 임시 숙소는 페어뱅크스 동쪽으로 몇 시간쯤 떨어진 어느 허허벌판에 있었다. 나는 영하 30도의 온도에 크레인의 정상에 올라가 다른 크레인과 연결하는 고공 인양 노동자로 일했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거의 완성된 송유관의 연결 부분에 가스가 새지 않도록 송풍기를 감시하는 일을 했다. 지루하고 한가한 일이었고,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이 얘기는 뒤에 다시 할 것이다.

노동자 캠프에서의 생활은 괜찮았다. 캘거리처럼 알래스카는 석유 붐을 타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밤 고급 스테이크와 대게를 먹고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여가 활동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건전하지 않은 유흥도 있었다. 나와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개 남부 출신이었다. 나는 그 덕분에 지금도 맥주 몇 잔이 들어가면 남부 특유의 오키(Okie) 억양이 입에서 나온다.

빌리 오캘러한(Billy O'Callaghan)이라는 50대의 남자가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머스탱 목장(the Mustang Ranch)에서 젊은 여자의 팔에 안겨서 죽는 것이 유일한 목표라는 회개를 모르는 아일랜드 출신의 알코올 중독자였다. 빌리는 내가 작업이나 수리 같은 일을 제대로 하려고 애를 쓸때마다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와인만큼 괜찮은 파트너야, 와인처럼 근사해.”라고 말하곤 했다. 빌리에게 ‘와인처럼 근사해’이라는 표현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최고의 장인 정신을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와인을 떠올리곤 한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2년이나 일할 생각은 아니었다. 여름 한 철만 일하고 가을 학기에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캘거리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해도 시간당 3.5달러밖에 못 벌었지만, 그곳에서는 13.5달러를 받을 수 있다. 나는 매일 18시간씩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일했다. 다른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18시간 일하면 8시간은 정해진 시급의 두 배를 받았고, 휴일과 일요일 근무는 세 배를 받았다. 첫 근무 사흘 동안 휴일과 주말까지 끼고 나니 600달러나 벌었다. 캘거리에서 여름 내내 번 것보다 많은 액수였다.

돈 말고도 훗날의 나를 있게 한 다른 많은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노동자 캠프에서 나는 약물과 알코올에 절어서 인생을 어렵게 살아온 수많은 남성 노동자들을 만났다.


100편의 최고의 소설들

이 무렵 어머니는 <뉴욕타임스>의 기사 하나를 보내주셨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의 이름은 아마 아트 부흐발트(Art Buchwald)였을 것이다.) 인체의 운동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뇌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수영 훈련을 통해 육체가 발달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두뇌도 발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부흐발트는 훈련에 의해 근육이 발달하는 것처럼 두뇌도 훈련을 통해 발달한다고 주장했다. 뇌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19살밖에 안 된 나이였지만, 나는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는 1975년 당시에는 아무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나는 알래스카에서의 시간을 돈을 버는데 뿐 아니라 두뇌를 훈련하는 데도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마리화나도 끊고 청소년기의 음주도 끝냈다. 나는 매일 소설 한 권을 읽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에 시간이 충분했다.

신문에서 보았던 100권의 필독 도서 목록으로 시작했다. 그 때의 결심으로 아마도 나는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19살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책이 두 권 있다. 조지프 헬러(Joseph Heller)의 『캐치22(Catch-22)』, 아인 랜드(Ayn Rand)의 『아틀라스(Atlas Shrugged)』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러나 손무의 『손자병법』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알래스카에 있는 동안 읽을 수 있었다.

『아틀라스』는 상당히 긴 소설이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위대한 사람이 되고,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여정을 밟아 가는 혁신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대그니 태거트(Dagny Taggart)는 오빠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가업인 미국 최대의 철도회사를 운영하는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대그니의 애인인 기업가 행크 리어든(Hank Rearden)은 철보다 강한 새로운 금속 합금을 발견을 한 사람이고, 그의 삶을 갉아 먹으려 정치인들과 친척들의 훼방을 극복하며 스스로 위대함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이 책에서 존 골트(John Galt)라는 미스터리 엔지니어이자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그의 실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누가 존 골트인가?(Who is John Galt?)”라는 질문이 반복되고 있다. 그 자체로 문화적 시금석이 된 문구이다.

『아틀라스』는 개인의 창의성과 헌신, 그리고 비전을 통해 세상을 평범함에서 위대함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해주었다. 이 생각이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내 삶에 어떤 화두를 던져줄지 그때는 몰랐다.

『아틀라스』는 노동조합 시스템에 만연한 비효율성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 나는 송유관 현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 일도 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책을 읽을 시간을 좀 더 많이 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현장에서도 노동조합의 입김 때문에 혼자 해도 충분한 아주 단순한 작업조차도 한 명은 기계를 운전하고, 한 명은 다른 스위치를 조작하고, 다른 한 명은 기계의 가스를 점검하도록 하는 식으로 굳이 세 명에게 나눠주는 비효율성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개인의 독창성이나 혁신이 발휘될 여지는 없다. 최악의 사회주의를 목격한 것이다. 노조 간부들이 노조원들에게 일을 대충 천천히 하도록 유도하면, 회사는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노조는 더 많은 조합비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무언가를 고안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노조원들에게는 엄청난 급여를 지급하는 상황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즉 일하는 것보다는 파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볼 수 있었다.

인생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즉 몇 년을 두고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해서 걸러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젊은 내게는 귀중한 교훈이었다.

어쨌든 나는 한편으로는 돈을 모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과 두뇌 계발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알래스카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그 후 몇 년간의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송유관 관련한 그곳에서의 일은 그저 나의 삶을 돈과 맞바꾸는 일에 불과하가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미 수영선수 생활을 하면서 10년 정도의 장기 목표를 세웠던 경험이 있었다. 각 연령대 그룹 대회에서 내가 깨고 싶었던 기록이 있었고, 그것은 내 생일에 맞춰 다음 연령대로 올라가기 전까지 달성해야 할 목표가 되었다.

좀 더 미래를 내다보면서 20살까지 내 집 마련, 30살 이전에 창업, 40살 전에는 은퇴라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서 은퇴라는 개념은 내 삶을 어떤 조직이나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통제하게 되는 상태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도 원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사업가의 삶은 내게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에 원하는 대로 순응하는 대가로 돈과 삶을 맞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난생처음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만 가지고 외딴곳에서 일하던 19세의 소년에게 이런 생각은 일장춘몽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세운 목표는 다가올 세월을 진지하고 진실하게 상상한 결과였다.

나는 18개월 만에 송유관 현장을 떠났다. 그때까지 내가 번 돈은 15만 달러 정도였다. (현재 가치로는 7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알래스카를 떠나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나의 내면은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고 있었다. 송유관 현장에서 일을 계속할수록 나는 그 곳의 문화에 동화되고 있었다. 입에서는 쉬지 않고 욕설이 튀어나왔고, 일과 관련된 대화가 아닌 다른 대화를 하는 법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흔 살쯤까지 버티면서 한밑천 잡아서 떠나겠다고 생각하며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이 벌고자 하는 액수의 돈을 19살쯤이나 20살쯤에 벌어서 떠날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어떠했을까? 사실 상상만 해도 매력적인 일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내가 그곳에서 번 돈과 같은 액수의 돈을 40세가 되기 한참 전에 벌어서 그곳을 나왔다고 해서 나와 똑같은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다른 사람도 먼 훗날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고생을 감당할 의지나 추진력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하다.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나의 추진력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인지, 수영선수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일까? 아니면 송유관 공사장으로 나를 인도해 준 친구 어머니를 우연히 만난 행운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가?

여하튼 나는 내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다. 20살 무렵에 집을 장만한 것이다. 넓은 방에 세 개나 있는 집은 은행 대출을 일부 받았는데, 내 돈이 연리 3%의 이자를 받는 예금 계좌에 예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금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몰라서 연 19%의 높은 이자로 대출을 받은 것이다. 현금의 흐름과 운영에 관한 첫 번째 교훈이었다. 어쨌든 나는 겨우 19살에 내 집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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