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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행복 합의>

03. 신독 : 내용과 총량으로 격이 결정되는 행위

by BOOKCAST 2022.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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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도합 12년의 학교생활을 통틀어 그 뜻이 가장 고고하고 도도해 처음 만난 이후 내내 가슴에 남아 있는 단어가 있다. 신독(愼獨)이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다’라는 뜻이다.(출전 : 『대학』)

10대 때 신독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올랐던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불경스런 행위-콧속에서 생성된 이물질 덩어리를 손가락을 이용해 바깥으로 탈출(얌전히 바닥으로 버리거나 멀리 튕긴다)시키는 것, 화장실에 서의 모습, 말로는 일절 하지 않았지만 일기에는 한 번씩 등장했던 욕설 등-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오르며 순간 표정이 의미심장해진다. 곁에 신경 쓸 사람 없이 혼자라는 사실은 일견 무한한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얼마나 많이 남을 의식하고 사는지. 정작 남들은 자기 생각하느라 남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말이다. 

유교 경전인 4서 중 하나인 『대학』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강조한다.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수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 바로 신독이다.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신독은 중국의 유학자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비가 추구했던 핵심적인 삶의 철학이었다. 성리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도 신독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어느 날 그는 기생들이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불현듯 일었던 마음속 한 자락의 탐심마저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또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 머물려고 했던 집 주인이 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거처를 옮긴 것도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환경을 아예 만들지 않으려는 신독의 발로라 하겠다. 

옛날 30명의 제자를 둔 노스승이 있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비롯하여 많은 것들 을 배웠다. 어느 날, 한 제자를 총애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29명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항변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데, 스승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불평불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 모습을 걱정스럽게 여기던 스승은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 문제를 냈다.

“너희들에게 시험 문제를 하나 내겠다.”

30명의 제자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새를 한 마리씩 건네주며 “지금부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이 새를 죽여서 가져오너라.” 하고 말했다. 제자들은 곧바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제자들이 하나둘 돌아와 죽은 새를 의기양양하게 스승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났는데 스승의 총애를 받는 제자는 보이지 않았다. 스승과 29명의 제자들은 그 제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숲속 어귀에서 살아 있는 새를 안고 우두커니 서 있는 제자를 발견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다른 제자들은 새를 죽이고 돌아오라는 문제를 해결했는데, 너는 왜 아직까지 새를 죽이지 못한 것이냐?” 

제자가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는 분명히 새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죽이라 하셨지만, 이 세상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은 없었습니다.”

제자의 대답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스승이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나무 뒤에 숨어 베려고 해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고, 바위틈에 숨어 새를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29명의 제자들은 그제야 스승이 이 제자를 총애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天知 地知 我知 子知).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화를 그릴 때의 일화란다. 구석까지 꼼꼼하게 그리는 그를 보고 친구가 물었다. “아무도 볼 수 없어 모를 텐데, 뭘 그리 애쓰는가?” 미켈란젤로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 내가 알고 있잖은가.”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어쩌면 그 이상의 강도로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로 하는 복합적인 존재 다. 이 세상에 인간만큼 복잡다단한 동물이 있으랴. 크게 일과 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영위하며 보통 태양이 있는 동안에는 생계로서의 직업이나 일을 하고 밤이면 가정으로 깃들어 휴식과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다양 한 모습의 가면(페르소나)을 벗어버리고 오롯이 한 자유인으로서의 모습만이 남는다. 

새벽 자시(23~1시)에 잠들면 몸의 피로가 풀리고 폐가 열리는 인시(3~5시)는 몸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스님들의 기상 시간이 보통 인시인 것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전 세계에서 강력한 자기장의 볼텍스를 자랑하는 미국 세도나 명상 여행을 다녀온 후 오랫동안을 인시에 알람 없이도 저절로 잠이 깨어 정적 속에서 명상, 기도, 글쓰기를 했던 시간들이 있다. 자연의 절대적인 시간에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의 생체 시간도 함께 맞추면 자연스럽고 좋다. 식구들 다 곤히 잘 때 홀로 깨어 있는 시간은 많은 영감이 일어나기도 하고 하루를 계획하기에 이상적이며 하늘과 가장 잘 통하는 보석 같은 때이다. 보통 수행자들은 낮에 태양이 있을 땐 육체를 단련하고 ‘달밤에 체조’를 함으로써 내면적 수련을 통해 내공을 단련한다.       

초등 6학년 때였다. 옆 반 담임 선생님이 6학년 학생 전체 중 희망자를 모집하여 방과 후에 서예를 가르쳐주셨다. 왈가닥이었던 성격이 글 쓸 때만큼은 차분해졌다. 손가락에, 콧잔등에 먹을 묻혀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정성으로 썼던 실력으로 대구 시내 서예대회에 나갔다. 투박한 필체로 써 낸 작품이 장원 바로 아래인 차상을 받게 했다. 학교의 자랑이었고, 표구된 작품이 한동안 교장 선생님 집무실에 걸려 있었다. 고풍스런 서예를 시간의 더께가 느껴지는 취미로 삼고 싶었던 초심을 살려 가까운 어느날 문득 서실을 찾을지 도 모르겠다. 

혼자일 때,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만나는 순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의 차이가 인간의 품격과 인격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는지. 남이 보지 않는 시간을 채우는 나만의 내용과 방법과 정도에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고 더욱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요사이 다시금 공고화, 체화되고 있는 두 가지 신독 행위가 있으니 기상 직후 절 수련하기와 키보드 앞에 앉아 글쓰기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더없이 행복한 자아 몰입의 시간이다. 아 참, 몸치인 나는 혼자 있을 때 음악이 있게도 없게도 하여 막춤을 즐겨 추기도 한다. 그로 하여 음주가무를 마스터하기 직전에 있다. 어차피 막춤은 자기만족임에랴. 

혼자라고 ‘느껴질’ 때 할 수 있는 신과의 대화 혹은 기도: 
하늘이시여, 저를 아십니까? 
하늘이시여,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늘이시여, 저를 사랑하십니까? 

기도, 명상, 수행, 글쓰기, 서예 등등으로 나의 품격을 높이는 노력을 시도해 본다. 그 내용과 총량으로 격이 결정되는 신독은 그 사람의 정수에 다름 아니다.

 


“신독이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느니라. 남에게 거짓되게 행하고서 그 속임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자신의 영이 이미 본심에 알리고, 그 본심은 이미 하늘에 고하고, 하늘은 이미 신명계에 명하시니, 신명은 높은 곳에서 일월로 밝게 내려다보고 계시느니라.” 
- 『참전계경』 제5강령 제1조 제3목 신독(제187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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