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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행복 합의>

01. 순간 : 행복을 이루는 최소의 시간 단위

by BOOKCAST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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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이었다. 내일이면 진짜 새해가 시작되는 설이다. 아르바이트 면접 간 둘째가 어디쯤일까 싶어 3시쯤 전화를 걸었을 때 인사동이라고 했다. “우리도 나갈까?” 여기서 우리란, 아들을 뺀 나와 막내를 지칭한다. 귀한 명절 연휴가 아닌가. 음식은 다 해놓았겠다, 큰 일거리가 없었다. 아직 해가 있을 때 나가고 싶었다. 가는 해의 마지막 해인 셈이다. 엄마와 언니의 전화 내용을 듣던 막내가 방에서 튀어나오며 “우리 외식해?” 하더니 “우와앙, 신난다. 꽃단장해야지.” 하며 제일 신나 한다. 밖으로 나왔다. 어머, 오늘 날씨 왜 이래? 음력 설 전날이 진정 맞는 것인지? 거짓말 조금 보태어 봄날이었다. 3일 전 아들이 입대한 나의 쓸쓸한 마음을 단박에 녹여주는 훈풍이 불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의 마음속 태양을 믿고 있지만, 실제 해님만이 줄 수 있는 따사로운 기운에 힘입어 더욱 기분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둘째가 또 연락을 해왔다. “응, 우리 거의 다 왔어.” 그러나 둘째의 용건은 애초에 정한 약속 장소를 변경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미리 가 확인해 보니 코로나로 7시까지밖에 하지 않는다는 거다. 7시면 좀 짧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설마 그 넓은 동네에 느긋하게 밥 먹을 데가 없으려고? 인사동 나들이 때면 우리 가족 부동의 목적지였던 그곳은 오늘 그녀들의 낙점을 받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 인사동으로 진입하고서도 조금 걸었다. 발걸음이 곧 날 것 같다. 곧이어 둘째가 시야에 나타났고 셋은 팔짱을 끼고 대로를 활보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한시바삐 무언가를 먹여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측으로 대형 쇼핑몰이 보였다. 음식점과 각종 매장들로 그 큰 건물이 다 채워져 있었다. 음식 취향이 달라도 한 끼 정도는 양보하여 맞추면 그만. 중요한 건 메뉴가 아니라 마감 시간이었다. 외부에 붙은 먹음직스러운 사진을 보고 들어갔건만 생각했던 메뉴가 아니고, 어떤 곳은 이 황금 시간에 30분간 브레이크 타임이란다. 이윽고 결정한 곳은 낙지와 곱창과 새우의 삼합을 주메뉴로 하는 곳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이들과 음식점엘 가면 메뉴 고르는 일에서 짐짓 뒤로 빠지는 나는 이번에도 “너희가 알아서 골라.” 하며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설인데 혹시나 오지 않을까?’ 
마침 이사 관련한 전화를 한 통 받았고, 음식이 나오기 전 모르는 번호가 두 번째로 떴다. 이제까지의 나는 낯선 전화는 거의 받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 어느 때고 유연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판단과 대처를 잘 해야 한다. “얘들아, 엄마 이거 받을까 말까?” 딸들에게 물었다. 오오, 세심하면서 겁도 많은 나는 이렇게도 물었다. “모르는 번호 받았다가 문제 될 일 크게 없겠지?” 걱정이 과해도 너무 과하다. 엄마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혹은 조금은 진지하게 턱으로 고갯짓으로 반응하는 딸들을 눈으로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직전에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여보세요?”“여보세요?” 
“○○이니?”
“어!”

와아아아아아, 그것은 아들의 전화였다! 받기 직전 느꼈던 묘한 직감은 아들임을 알았던 거다. 이른바 여자들의 촉, 엄마의 촉, 특히나 자식과 떨어져 있을 때 텔레파시로 느끼는 엄마의 촉이었던 것인지. 신통방통하고 기쁘기가 말할 수가 없었다. 

설이라고 부모님께 전화하라 해서 하는 거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 황공한 상황에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다. 떡국도 못 먹이고 보낸 설 전 입대가 영 마음에 쓰였는데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참으로 고마웠다. 특별한 날과 거리 먼 보통 때의 입대라면 꼼짝없이 훈련 기간이 끝나야 들을 수 있을 첫 목소리가 아니던가. 입소일 오후 1시 7분, 부대 정문 앞에서의 마지막 통화 후 3일 만이다.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다 하릴없이 신호가 끊겨버렸을 때의 막막함이라니. 전화가 끝나고도 얼어붙은 듯 핸드폰을 멍하게 들고 있었다. 약속대로 다음 날로 군인 요금제로 바꾸며 5주간 핸드폰을 정지시킨 바람에 자기 전화로 못하고 부대의 높으신 분(최말단 훈련병 신분보다는)인 조교님의 폰으로 전화를 해온 것이다. 

잘 있니? 뭐 필요한 건 없어? 마스크가 얼굴에 잘 맞니? 줄이 안 맞아 아파서 가져간 밴드를 붙이고 있다고 한다. 저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이 있다. 아들 떠난 날, 통곡과 멍 때리기, 옛 사진 찾아보기로 퉁퉁 불은 눈으로 밤을 새다 발견한 인터넷 속 카페가 있다. 거기엔 대한민국 군인 관련한 각종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이런 보고가 있나,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아들 입대 전에 알고 찾아온 부모도 있었지만 나도 빠른 편에 든다. 한 이틀 열심히 판 덕에 요긴한 정보를 많이 입수하였다. 그 중 하나가 마스크 사이즈 문제. 우표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짜식, 10장으로 모자라다고? 오냐, 그중에 엄마한텐 몇 편이나 쓰나 보자). 폰이 정지 상태라 재난 문자 등 아무것도 안 되니 당장 폰을 쓸 수 있게 살려달란다. 재난 문자로 동선 파악이 되시는 군인님의 현실 상황을 깨닫는다. 

영상세대인 아들은 경험이 희박하겠지만 그 옛날 공중전화에서 돈을 더 넣으라고 깜빡깜빡 신호가 오듯 남은 시간이 보이는 모양이다. 1분 남았어, 하더니 어느덧 10초 남았어, 까지……. 그 지점이 되니 나는 마음이 더 바빠졌다. 아들이 무어라고 말문을 떼는 데 중요하지 않다고 자체 판단, 그런 건 됐고, 시끄럽고, 지금 시간이 없는데 말이야, 가 튀어나왔다. “우표 같은 것, 네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현명하게 지혜롭게 알아서(사든지 옆의 친구(전우)에게 요령껏 빌리든지) 하고 엄마는 밖에서 할 일을 할께! 사랑한대이! 아들아, 사랑한대이!” 그러자 폰 저쪽에서도 오랜만에 듣는 대답이 들려왔다, “어, 엄마, 나도 사랑해.” 그리고 순식 간에 1번 동생, 2번 동생에게도 핸드폰을 넘겨 목소리만 짧게 서로 교환하였다.  

입대 전 둘이 미리 약속한 것이 있다. 처음 걸었을 때 내가 못 받으면 곧이어 한 번 더 걸어달라는 것. 군인 아들의 첫 전화를 이런저런 연유로 놓치고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는 엄마들이 부지기수더라. 이후 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전화도 귀신같이 다 받아냈다. 엄마 닮아 사격을 잘해 따 낸 행운의 포상 전화까지 말이다. 세기의 사진이 순간 포착에서 나오듯 사람은 순간에, 찰나에 강해야 한다.  

아버지 49재가 끝나면 그간의 소요 경비 포함, 먼 길 혼자 왔다 갔다 하느라 수고했다고 엄마가 금일봉을 주시기로 했다. 화요일 막재가 끝나고 목요일에 친정에 갔다. 둘째가 다음 날까지 대학교 등록을 해야 했다. 최대한 무겁지 않고 가볍게 말을 건넸다. 평상시 같지 않게 우회가 아닌 정공법으로 말했다. “엄마, 돈 얘기 좀 하자. 하하.” 말해놓고 스스로가 놀라웠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요번에 주시기로 한 돈이에요." 엄마와 하기 어려운 대화 주제가 몇 있는데 돈도 그중 하나다.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래, 이 번엔 내가 좀 여유가 없네.” 하신다. 그렇게 한마디로 싹 잘라버렸다. 일차에 꺾이면 이차 진행을 할 줄 모른 다, 나는. 용기와 의지가 동시에 상실되고야 만다. 그것이 참 이상했다. 또 하나가 이상했다. 엄마는 약속을 잘 안 어기는데…….

그리고 2주쯤 지났나 보다. 이사로 거리가 멀어진 이후, 자주 뵈러 가야 하지만 소심한 나는 그 일이 걸려선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직전까진 주 1회 외박도 하곤 했었는데……. 근처에 볼일이 있던 토요일 오후, 모임에서 얻은 도시락 하나와 맛있게 구워진 고구마를 사서 예고 없이 엄마에게 갔다. 토요일 오후는 집이 더욱 고요하다. TV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봄맞이 기획으로 장사익님과 최백호님이 나오는 것을 같이 보았다. 아는 노래들은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희망찬 봄날을 주제로 한 공연이 기분을 좋게 하였다. 저녁을 먹는데 같이 TV를 봐서 너무 좋았다 하신다. 순간 마음이 짠하다. 더불어 보통 때의 200프로 인상된 용돈을 차비로 주신다.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올게.” 포옹 후 나왔다. 엄마에게 갔다 올 때면 늘 마음이 애틋하다. 한 10분쯤 걸어 나와 지하철을 막 탔을 때 엄마로부터 카톡이 왔다. “기업은행으로 ○○○만 원 보냈다. 필요한 데 쓰도록 해라. 건강 조심하고.”

문득 이 말이 생각났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 최종원, 『인생교훈』 중에서

그때, 내 급한 마음에 내 얕은 마음에 섭섭함을 느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하지 않은 게 참 잘했다 싶었다. 참은 것이 잘했다. 상황이란 게 있었을 테고, 엄마가 어련해서 그러셨을까. 하신 약속이 있었는데, 마음에 걸리셨으리라. 참는 것은 복이다. 세 치 혀가 복도 부르고 화도 부른다.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여타의 경험에서도 진리다.

낯선 전화를 받을까 말까 하다가 받고 보니 아들이었다. 할까 말까 하는 선택의 순간에 느낌을 따랐더니 복이 따랐다. 그러한 기적적인 순간은 특별한 경우고, 일상의 순간들이 모여 행복을 이룬다. 그래서 순간은 행복을 이루는 최소의 시간적 단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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