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기쁨의 본질은 그 과정에 있으므로.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인과란 원인과 결과의 합성어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혹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제는 인과관계의 오래되고 영원한 딜레마다.
인과란 눈으로만 보면 쉬운 단어와 그 뜻이다. 그러나 내 삶에 들어오게 되면 느낌이 달라진다. 삶의 인과관계 중 수긍이 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살면서 수시로 던졌던 수많은 “왜?” 특히 “내가 왜?”의 물음들을 보면 말이다.
왜라는 질문에는 ‘왜냐하면’이 답으로 따라 나오는 게 수순이나 내 인생의 인과에서는 간단치가 않다. 눈에 보이는 이미 벌어진 결과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왜 우리 부모는 그래?”
“어떻게 그/그녀가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나에게 이 병이 생겼지?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냐고.”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꼭 주변의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상황에 자위의 시선을 보낸다. 어제의 상황에서 나만 악화된 것 같은 느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 나아가 원망의 감정이 생겨나기도 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인과는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원인은 많은 경우 내 안에 있다. 내 안에서 답을 찾음이 옳을 것이다. 내 심신의 관리 소홀로 빚어진 여타의 문제들.
병은 가족력을 포함한 기저 질환 등 자신에 대한 기본 지식 부재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겠다. 또는 평상시의 생활 습관에서 발병하기도 한다. 아무런 전조 현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병은 드물 터이다. 속에서 일어나는 원인을 알기가 어렵다면 병이라는 결과로서 나타나기 전 몸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를 잘 알아차리 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고 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몸과 나누는 대화가 필요하다.
사람 사이의 인과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 부모의 이야기는 그 윗대 조상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알 문제니 접어두기로 한다. 배우자의 문제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내가 부모일 때 자식의 문제는 나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룰 때 단골 명제가 있지 않은가. ‘문제 자녀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을 뿐이다.’ 나는 자녀의 이러저러한 현상학적 결과에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일 확률이 아주 높다. 미혼일 때는 뭣도 모르면서 부모-자식 간의 잘못이나 책임의 비율을 따진다며 꽤나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여 51:49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부모가 되고 보니 엉터리였음을 알겠다. 부모-자식 관계에서 유약하기 그지없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영향력은 99나 100에 가깝다! 그런데 부모가 그걸 모르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몰라서 알려주면 이젠 인정하지 않는다. 자존심 등의 이유로 인정하기가 싫은 것이다. 무지도 잘못이고 죄이지만 인정하지 않음도 그에 못지않다. 인정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도 저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질문하다 장난삼아 “왜 나는 건강해?” 하는 순간 뇌가 깬다. 안 좋은 쪽으로의 질문만 할 것이 아니다. 좋은 질문, 긍정의 질문을 하면 그 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저 유명한 『더 시크릿』에서 말하듯 말에는 에너지가 있어서 긍정어는 긍정의 에너지를, 부정어는 부정의 에너지를 몰고 다닌다. 테레사 수녀님은 시자의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가주십사 하는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평화’를 ‘옹호/지지’하는 시위에 참여하겠노라 답했다. 건강한 이유를 찾고 찾다 보면 더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골몰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위해서는 중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해서 보면 새롭게 달리 보인다. 인간은 복합적 인격체이기 때문에 한 가지 질문에 한 가지 답만이 정답이기는 어렵다. 단계를 더해가며 5 Whys를 묻다 보면 많은 답 중 명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대화하는 기술은 간절함을 토대로 자신의 뇌를 믿고 스스로에게 하는 기법이다. 질문이 정확하면 답도 정확할 것이다.
“왜 하필 나야?”가 아니라 언제나 무슨 일이든 나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인정하자. 세상의 모든 좋은 결과들에 내가 더 많은 원인이 될 수 있도록 살아보자.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결과에 나를 원인으로 하는 것은 되도록 피해 갈 수 있도록 살아보자.
“엄마, 우리는 왜 이리 예뻐?”
“어머니, 예쁘게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새봄을 맞아 한창 사랑에 눈을 뜨는 딸들이 그들을 있게 한 엄마에게 요사이 하루가 멀다 하고 하는 말이다. 지는 해가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함으로써 내일의 새로운 태양은 더욱 붉을 수 있을 테지. 내가 과거라면 너희는 현재요, 미래지. 나는 원인이고 너희는 위대한 결과인 게지.
'자기계발 > <행복 합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소유 : 놓음으로써 비로소 갖는 (1) | 2022.07.06 |
---|---|
05. 창조 : 오늘의 나는 미래의 나를 돕는다. (1) | 2022.07.05 |
03. 신독 : 내용과 총량으로 격이 결정되는 행위 (1) | 2022.07.02 |
02. 가치 : 무엇으로도 측량, 대체할 수 없는 절댓값 (0) | 2022.06.30 |
01. 순간 : 행복을 이루는 최소의 시간 단위 (1) | 2022.06.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