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포가 장막에 들어와 축하하자 동탁이 격려했다.
“내가 황제에 오르면 네가 천하의 군사를 모두 거느려라.”
여포는 절해 감사를 표하고 장막 앞에 머물러 잤다. 이날 밤 아이들 10여 명이 교외에서 노래하는데 소리가 바람에 실려 장막까지 들려왔다.
천 리 뻗은 풀 얼마나 푸르더냐
열흘 내다보면 살지 못할걸
노랫소리가 너무 구슬퍼 동탁이 이숙에게 물었다.
“저 노래는 어떤 길흉을 말해주느냐?”
“역시 유 씨가 망하고 동 씨가 흥한다는 뜻입니다.”
【천 리 뻗은 풀밭이라는 천리초(千里草), 세 글자를 합치면 동탁의 성인 동(董)자가 되고, 열흘 앞의 일을 미리 알아맞힌다는 십일복(十日卜), 세 글자를 합치면 동탁의 이름인 탁(卓)자가 된다. 동탁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예언을 노래한 것이다.】
이튿날 새벽 동탁이 의장을 벌려 세우고 조정으로 가는데, 난데없이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흰 수건을 쓴 도사가 손에 긴 장대를 들고 나타났다. 장대에는 열 자 길이의 천을 매달았는데, 양쪽 끝에 입을 뜻하는 구(口) 자가 하나씩 쓰여 있었다.
【구 자가 둘이면 여포의 성인 여(呂)자가 된다. 또 천은 한자로 포(布)이니 여포를 조심하라는 암시였다.】
동탁은 여전히 멋모르고 이숙에게 물었다.
“이 도사는 누구냐?”
“미친 자입니다.”
이숙은 군사를 불러 도사를 쫓아버렸다.
동탁이 조정에 들어서자 대신들이 관복을 정중히 차려입고 길에서 맞이했다. 이숙은 한 손에 보검을 들고 다른 손으로 수레를 잡고 나아갔다. 일행이 궁전 문에 이르자 의장을 든 자들은 문밖에서 막히고, 수레를 호위하는 20여 명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동탁이 멀리 바라보니 왕윤을 비롯한 대신들이 각기 보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동탁이 흠칫 놀라 이숙에게 물었다.
“검을 든 것은 무슨 뜻이냐?”
이숙은 대꾸하지 않고 수레를 밀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왕윤이 높이 외쳤다.
“여기 역적이 왔다! 무사들은 어디 있느냐?”
양쪽에서 무사 100여 명이 나타나 화극과 긴 창을 겨누어 동탁을 찔렀다. 그러나 동탁이 겉에 입은 관복 안에 갑옷을 받쳐 입어서, 창과 극이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갑옷이 가려주지 못하는 팔을 찔린 동탁이 수레에서 굴러떨어지며 소리쳤다.
“내 아들 봉선은 어디 있느냐?”

여포가 수레 뒤에서 돌아 나와 목청을 가다듬고 외쳤다.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친다!”
여포가 화극을 콱 찌르니 뾰족한 날이 바로 동탁의 숨통을 꿰었다. 그러자 이숙이 어느덧 동탁의 머리를 잘라 손에 들었다. 여포는 품에서 조서를 꺼내 소리쳤다.
“조서를 받들어 역적 신하 동탁을 토벌했다. 나머지 자들은 잘못을 묻지 않는다!”
무사들은 모두 만세를 높이 외쳤다. 때는 한 헌제 3년(192년), 4월 22일이었다.
동탁이 죽자 여포가 높이 외쳤다.
“동탁을 도와 나쁜 짓을 한 자는 이유다! 누가 그를 잡겠느냐?”
이숙이 응대했다.
“내가 가겠소!”
바로 이때 조정 문밖에서 고함이 일어났다.
“이유의 집 종들이 이미 이유를 묶어 와서 바칩니다.”
왕윤이 분부를 내려 이유를 단단히 결박해 저잣거리로 끌고 가서 목을 치고, 동탁의 주검을 네거리에 내놓아 뭇사람에게 보였다. 동탁이 하도 살이 쪄서 주검을 지키는 군사가 배꼽에 심지를 박아 등불을 켰더니 비계 기름이 땅에 흥건히 흘렀다. 지나가는 백성은 저마다 손으로 동탁의 머리를 때리고, 발로 몸뚱이를 짓밟았다.
왕윤은 여포에게 황보숭, 이숙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미오로 가서 동탁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람들을 붙잡게 했다. 동탁의 심복인 이각과 곽사, 장제, 번조는 동탁이 이미 죽고 여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비웅군을 거느리고 밤낮없이 양주로 달아났다.
미오에 이른 여포는 먼저 초선부터 차지했다. 황보숭은 성에 감추어둔 양가 자녀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미오성에 쌓은 재물을 점검하니 황금 수십만 냥, 백금과 은 수백만 냥이 있고, 좋은 비단과 진주, 보석, 기물, 식량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여포 일행이 장안으로 돌아와 왕윤에게 보고하니 왕윤은 군사들에게 재물과 술, 음식을 내려 수고를 위로하고, 조정의 일을 보는 도당에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모아 경축했다.
사람들이 한창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가 보고했다.
“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동탁의 주검에 엎드려 통곡합니다.”
왕윤이 화를 냈다.
“동탁이 죽어 선비와 백성이 경축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어떤 자가 감히 홀로 운단 말이냐? 가서 잡아 오너라!”
잠시 후 그 사람이 잡혀 오니 대신들이 모두 놀랐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시중 채옹이었다. 왕윤이 꾸짖었다.
“역적 동탁이 오늘 죽임을 당해 나라의 큰 경사인데, 그대는 한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경축하지 않고 오히려 역적을 위해 우니 어찌하여 그러는가?”
채옹은 순순히 죄를 시인했다.
“이 옹은 비록 재주 없으나 역시 큰 도리를 아는데, 어찌 나라를 등지고 동탁을 감싸겠습니까? 그저 잠깐 그가 이 옹을 알아주고 써준 은혜를 떠올려 저도 모르게 그만 울음이 나왔습니다. 그 죄가 큼을 스스로 알지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얼굴에 글자를 새기고, 발목을 자르는 데에 그치고 목숨을 붙여주셔서, 한나라 역사를 이어 써서 완성하도록 하여 죄를 씻게 해주시면 이 옹의 행운이겠습니다.”
대신들은 채옹의 재주를 아껴 모두 그를 구하려고 힘을 보탰다. 태부 마일제도 가만히 왕윤에게 말했다.
“백개(채옹의 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난 인재이니 그에게 한나라 역사를 이어 쓰게 하면 참으로 성대한 일이라 하겠소. 그의 효성은 이전부터 잘 알려진 바인데 갑자기 죽이면 사람들 신망을 잃을까 두렵소.”
그러나 품계가 더 높은 마일제의 권고도 왕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옛날 무제께서 사마천을 죽이지 않고 역사를 짓게 하시어, 황제를 비방하는 책이 후세에 퍼지게 되었소. 지금 나라의 운이 쇠약하고 조정 정사가 어지러우니, 간사한 신하가 어린 황제의 좌우에서 붓을 들게 하여 후에 우리가 비난을 듣게 해서는 아니 되오.”
【사마천의 《사기》는 3000년 역사를 담은 불후의 명작이지만 사마천이 무제의 신하로서 황제가 저지른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주인을 모독한 책이라고 비난하는 견해도 있었다.】
마일제는 말없이 물러나 사석에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왕윤은 그 후대가 없겠소! 착한 사람은 나라의 보배요, 역사책을 쓰면 나라의 본보기가 되오. 보배를 버리고 본보기를 없애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소?”
왕윤은 마일제의 말을 듣지 않고 채옹을 감옥에 가두어 목매어 죽이게 했다. 선비들은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후세 사람들은 채옹이 동탁을 위해 운 것은 잘못이지만 왕윤이 그를 죽인 것은 너무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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