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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갓생사는 엄마들>

01. 달라진 엄마의 시공간 : 나는 갓생 산다!

by BOOKCAST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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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혀 있던 새벽이라는 방

가상의 집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구석진 곳의 방문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 사는 사람조차 저런 방이 있었나 할 정도로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버리긴 아깝고 쓰기 애매한 짐들이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다. 오랫동안 먼지로 가득 차 있다 보니 이제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지난 10년, 새벽 시간은 내게 닫혀 있던 방이었다.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대신 나는 나만의 시간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늘 시간이 부족했고 시간에 쫓겨서 살았다. 책을 읽고 싶은데 시간이 없었고 영화를 보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다. 애들과 놀아주는 시간에도 내 시간을 찾아 헤맸다. 왜 나만의 시간이 없을까. 왜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을까.

나는 시간에 쫓기던 사람이었다. 대학생 때 학비를 벌기 위해 학교신문사에서 일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대학 생활 내내 기사 마감으로 주말까지 마감 시간에 쫓겨 살았다. 아직도 생각난다. 수업이 끝나면 과외 시간에 늦지 않으려 버스 정류장까지 허겁지겁 뛰어다녔다. 과외를 하면서도 피곤이 몰려와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았다.

당시 나는 분주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취업을 하고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도 그랬다. 매일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을 정하고 그것을 해치우기 바빴다. 그러다 번아웃이 오면 오랫동안 깊은 침체기를 보냈다.


시간 빈곤자의 삶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서도 시간 빈곤자의 삶은 계속됐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와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육아는 양보다 질이라는 말은 실전에서 통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엄마와 살을 부대끼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부족함을 드러냈다.

그 부족함이 보일 때마다 워킹맘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과 보내는 잠깐의 시간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부족한 나만의 시간이 자꾸 생각났고 있는 시간마저 아이들에게 탈탈 털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모성이 부족한가, 나는 못된 엄마인가라는 자책으로 이어졌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감에 쫓겨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 외에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신문을 보거나 채팅으로 수다를 떨거나, 온라인 기사를 체크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꾸만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이거 해볼까, 저거 해볼까 시도만 하다 포기했다.

어느새 포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떤 시간에도 정박하지 못하고 시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생각 없이 쓰다 보니 줄줄 새어가는 돈처럼 시간도 그랬다. 어디에 어떤 용도로 시간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시간은 자꾸 부족했다.

연예인의 집 정리를 도와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집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의뢰인들의 공통점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또 공간의 용도가 분명하지 않았다. 작은방이 침실인지, 컴퓨터방인지, 창고인지 몰랐다. 정리 컨설턴트가 하는 일은 먼저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꺼내 필요 없는 것을 정리한 후, 공간들에 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이 물건들을 재배치하는 일이다. 나에게도 이렇게 두서없이 나열된 시간의 정리가 필요했다.


새롭게 생긴 나만의 시공간

새벽 기상을 통해 나는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그 방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에만 열리는 방으로 분명한 역할을 부여했다. 어지럽게 놓인 짐을 과감히 버리고 필요한 짐을 재배치했다. 마치 시간 개척자가 된 심정으로 오래 파묻혀 있던 새벽이라는 시간을 발굴했다.

무엇보다 이 시간만큼 나를 위한 것에 오롯이 집중했다. 독서와 운동으로 시작해 글쓰기까지 나의 성장을 위한 일들에 몰입했다. 출근시간 전 3시간 정도를 나를 위해서만 투자했다. 

 

 

그렇게 하루를 꽉 채운 채로 시작하니 출근해서도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에 집중하지 않는 시간에는 독서대에 펼쳐 둔 책을 읽었다.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됐기에 퇴근길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 온전히 집중했다. 각각의 시간대별로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하루하루 견디고 버티는 느낌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면, 이제야 비로소 시간에 쫓기지 않고 선박의 키를 조종한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뿐만 아니라 물리적 공간도 생겼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책상을 거실 한켠에 놓았다. 아이들 책상이나 식탁 위를 전전했던 내게 ‘고정석’이 생긴 기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여기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간단한 스트레칭과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6시. 현관문 밖으로 신문이 배달되는 소리가 들린다. 일찍 일어난 아이들과 신문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출근 시간이 다가온다. 출근길 명상을 들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남편과 함께 새벽 기상을 해오면서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이제까지 새벽을 통해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아이들도 새벽 기상의 기쁨을 조금씩 알아가도록 해주고 싶다. 어릴 적 새벽에 일어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나처럼, 나의 아이들도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새벽을 일찍 열어 가기를 바란다. 그것만큼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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