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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

01. 사투리: 대한민국 비주류 언어

by BOOKCAST 202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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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씨가 서울 사람으로서 본인도 모르게 누리는 기득권은 상상 이상이다. 말씨만 해도 그렇다. 교양 있는 그가 쓰는 서울말은 ‘표준어’라는 권위를 갖고 있다. 아무개 씨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말투나 억양을 ‘고쳐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다. 그의 언어는 대한민국 주류다.


사투리 핍박의 역사

서울말은 언제부터 중앙어의 지위를 누렸나. 조선왕조가 시작되고부터다. 알다시피 고려의 수도는 개성, 신라는 경주, 고구려는 평양, 백제는 부여다. 고구려와 백제는 각 2번씩 수도를 옮겼다. 그러니까 조선 이전에 중앙어라고 할만한 지역 언어는 한두 개가 아니었던 셈이다. 1394년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부터 지금까지 쭉 서울말이 곧 중앙어다. 600년이 넘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조선 후기부터는 사투리가 관리들 사이에서 비웃음과 놀림의 대상이 되고 서울을 동경하는 지방 사람들이 결단코 서울말을 배우고자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사투리 탄압은 아니었다. 국가 권력이 나서서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해 대중들에게 강권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일본이야 당연히 지배의 편의와 효율을 위해 표준어의 도입을 서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말이 중심이 된 표준어를 설파한 건 일제뿐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민족 역량을 한 데 집중해 근대화를 이룩할 의도로 표준어의 제정과 설파에 적극적이었다. 동상이몽이지만 어쨌든 그 방향은 하나로 향했다. 표준어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지방어의 말살을 수반했다. 표준말 사정위원회가 의도적으로 서울 사람 위주로 구성되고 서울·경기 출신의 위원에게만 최종 결정권을 부여했다. 염상섭, 박태원 등을 필두로 하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까지 공격적으로 서울말 마케팅에 나섰다. 사투리는 본격적으로 없애야만 하는 해충 같은 지위로 떨어졌다.

광복 이후에는 좀 나아졌을까? 그렇지도 않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리 사회는 국가 재건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사투리는 전근대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욕설이나 사투리를 쓸 때마다 들은 사람이 지적, 성적표에 기입해서 지적된 사람은 매일 방과 후에 교장 선생과 함께 교정의 풀 뽑기 작업을 했다(…).”는 신문 기사가 연이었으니 사투리야말로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1970년대의 고속도로 건설은 지역 간 불균형 문제의 해결은커녕 중앙집중화를 부채질하기만 했다. 이 과정에서 ‘표준어(서울말)=근대’, ‘사투리=전근대’라는 인식이 공고해졌다. 1980년대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분열은 곧 민족의 분열이다. (…) 표준말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지도자가 어찌 국론을 통일할 수 있겠는가?”라는 신문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사투리는 마치 ‘지역감정의 대리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대중문화가 사투리를 구원했다… 정말?

1990년대 초반에도 비슷했다. 한국방송광고공사 산하 방송위원회에서 제정한 「방송 심의에 관한 규정」은 1992년 10월 사투리 규제를 더욱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투리는 점점 안방극장을 파고든다. 일단 사투리가 나오면 재미가 있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사투리를 쓰는 인물은 결코 주연은 될 수 없더라도 극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각 지역 출신들에 대한 편견을 적절히 활용해 캐릭터 표현을 효율적으로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캐릭터 표현이란 거다. 나쁜 놈을 더 나쁘게, 둔한 녀석을 더 둔하게, 똑똑한 이는 더 똑똑하게 묘사할 때 특정 억양을 활용하곤 했다. 지방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SBS 드라마 <모래시계>(1995)는 최고시청률 64.5%를 기록한 전설적인 드라마다.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밤 10시부터는 거리가 한산할 정도라 ‘귀가시계’라고도 불렸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역사적 맥락에 눈을 뜨는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다. 전라도 사투리에 대한 편견까지 함께 생겨버렸다는 게 문제다.

멋진 주인공 박태수(최민수)는 사실 도저히 서울말을 쓸 수 없는 인물이다. 좌익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장래가 막혀버려 어쩔 수 없이 광주를 무대로 한 조직폭력배 생활을 시작해 조직내에서 성장하는 청년이다. 유년 시절부터 전라남도 광주(현재 광주광역시)에 살았다. 그런데 서울말을 쓴다! 반면 최고의 악역인 이종도(정성모)는 구성진 전남 사투리를 구사한다. 이종도와 박태수는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지낸 사이인데도 쓰는 말씨가 전혀 다르다니 의아하다. 이들의 친구인 강우석(박상원)은 서울말을 쓴다. 왜냐하면 사법고시에 합격한 검사이기 때문이다! 같은 전라남도 출신이라도 주인공이거나 고위 공직자라면 응당 서울말을 쓴다. 그러니까 온 국민이 아는 명대사 “나 지금 떨고 있니?”는 결코 “나가 시방 떨고 있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래시계>야 뭐 벌써 27년 전 드라마니까 그렇다고 치자. SBS 드라마 <녹두꽃>(2019)을 보자. 이 드라마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혼란 속에서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진 이복형제의 이야기를 그렸다. 방영 당시 전봉준과 대립하다가 동지가 되는 백이강 역을 맡은 배우 조정석의 맛깔난 사투리 연기가 큰 화제였다. 그런데 정작 제목인 ‘녹두꽃’이 상징하는 전봉준(최무성)은 전남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영웅은 서울말을 쓴다. 다른 양반들도 마찬가지다. 사투리가 구성진 백이강은 영웅적인 역할을 하지만 천민 출신이다. 영웅 사이에도 격이 존재하는 셈이다. 진짜 영웅은 서울말을 쓰고, 아류 영웅은 사투리를 쓴다. 이런 방언 활용 방식은 기존 대중문화 콘텐츠에 반영된 표준어와 방언 사이의 위계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반면 모든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고 신나게 사투리를 쓰는 드라마도 있다. 바로 tvN <응답하라 1994>(2013)이다. 작품은 1994년 서울 신촌의 하숙집을 배경으로 지방 각지에서 상경해 한 집에 사는 대학교 새내기들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대학 농구 열풍과 ‘서태지와 아이들’ 등 1990년대 중반 문화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까지 정신없이 등장한다. 방영 당시엔 눈만 뜨면 이 드라마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투리는 이제 우리의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일까? 비주류에서 드디어 주류 문화로 입성한 것인가?

<응답하라 1994>가 사투리를 대중문화 콘텐츠 속 범죄자나 모자라고 촌스러운 사람을 표현하는 역할에서 해방해 낸 것은 기념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갖는 한계는 제1화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시간이 흘러 현재 시점에 세련된 어른으로 자리매김한 주인공 성나정(고아라).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읊조리는 내레이션과,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상남도 마산 출신인 남편 김재준(별명은 ‘쓰레기’, 정우)과의 통화에서는 서울말을 쓴다. 신나게 사투리의 향연을 벌여 놓고 왜 현재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사투리를 서울말로 ‘고친’ 걸까?

언어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만 13세 정도까지는 언어를 모어(母語)로서 습득한다고 본다. 대충 초등학교와 중학교 언저리까지 사투리로 말해왔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그 말씨가 그대로 유지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따라서 성인이 된 이후 아무리 서울에 오래 산다고 해도 새로 습득한 어휘는 표준어를 따라가겠지만 유년 시절부터 쓰던 억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레이션이야 그렇다 쳐도 마산에서 친남매처럼 함께 자란 남편과의 통화에서도 서울말을 쓰는 설정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은연중에 서울말을 쓰는 것이 마치 문명화된 것처럼 여기는 세태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응답하라 1994> 속 사투리는 1994년 미숙한 청년들에게는 주류였지만 2013년 성숙한 생활인들에게는 비주류인 셈이다.


중앙집중형 표준어 정책, 
계속 유지해야 하나

촌스러움과 미숙함의 상징처럼 보이는 사투리. 사투리의 지위는 표준어라는 전범(典範)이 존재하는 한 쉽게 회복되기 어려워 보인다. 현행 「표준어 규정」(1988. 1. 19. 문교부고시 제88-2호)에 따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여기서 표준어와 ‘교양인’이 결부되며 사투리를 쓰는사람들은 표준어의 정의 그 자체에서 박탈감과 모멸감을 느낄 수 있다. 사투리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냐고 비약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표준어는 급기야 헌법재판소에 갔다(헌재 2009. 5. 28. 2006헌마618 전원재판부). 표준어 규정 제 1장 제1항이 위헌이라 주장하는 이 사건의 청구인은 무려 123명이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 학부모, 공공기관의 공문서를 표준어로 작성하거나 그런 공문서를 접해야 하는 일반인들이다. 이들은 「표준어 규정」과 표준어로 교과서 및 공문서를 작성하도록 한 「국어기본법」이 국민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 및 교육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재판관 7대 2의 의견으로 기각됐다. 강제되는 표준어 규정의 범위는 공문서의 작성과 교과서의 제작이라고 하는 공적 언어생활의 최소한의 범위를 규율할 뿐이므로 표준어의 존재 그 자체는 합헌적인 것이라는 취지다. 다만 서구 선진각국의 경우 국가가 나서서 표준어 형성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참고해 적어도 문화의 영역에 있어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의 범위에 그쳐야 한다는 취지의 재판관 2인의 반대의견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반대의견의 숫자가 늘어날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줄곧 서울에 살다가 초등학교 4학년 한 해만 경상남도의 어느 소도시에서 지냈다. 서울말을 쓰는 나는 담임선생님의 ‘최애’ 제자였다. 국어 시간에는 나를 일으켜 세워 교과서를 읽게 했다. 굉장히 우쭐했다. 사투리의 바다에서 나 혼자서 고고하게 서울말을 구사했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하면 같은 반친구들이 보기에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그래도 군소리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주류의 권위는 비주류의 홈그라운드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차별적으로 등장하는 사투리는 주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자꾸 얘기를 해줘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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