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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

04. 길에서도 미디어에서도 존재가 지워진 장애인

by BOOKCAST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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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야 하는데, 나 정말 바쁜데, 이 시간에 여기서 꼭 이래야 하나. 이동권 투쟁을 한다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아무개 씨가 탄 객차와 플랫폼을 들락날락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모르나? 지금 이 시위 때문에 불행한 절대다수가 안 보이나? 평소에는 길에서 잘 보이지도 않더니 오늘 여기에 다 모여있네, 휠체어들.


온갖 종류의 사람으로 변한다며. 그럼 장애인은?

소수자 문제를 향한 관심은 어떤 특별한 계기에서 비롯한 때가 종종 있다. 당사자 혹은 주변인처럼 삶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매우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했다. 백종열 감독의 영화 <뷰티 인사이드>(2015)를 보던 중이었다.

남자주인공 김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 등등…. 고등학생 때부터 스물아홉 살인 현재까지 무려 12년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가구 디자이너인 그의 집에는 매우 다양한 옷과 신발, 가방, 화장품 등이 준비되어 있다. 같은 디자인의 크기만 다른 반지도 여러 개 있다. 발 크기 측정기와 안경점에서나 볼 수 있는 도수별 시력교정 렌즈 세트가 화면에 나온 이후부터는 나도 모르게 목발이나 휠체어,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흰 지팡이 같은 도구들도 당연히 등장할 거라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는 123명의 우진이 등장한다. 하지만 보청기를 끼고 있거나, 수어를 사용하거나, 시각장애가 있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사용하는 우진은 없다. 유럽 언어를 쓰는 백인 남성 우진, 일본 여성 우진, 한국 어린이 우진은 등장해도 신체장애가 있는 우진은 없다. 그러고 보니 우진의 집 안에는 계단이 많다. 계단이라… 모두 다 괜찮은가? 아니, 매일 무작위로 다른 인물로 바뀌는 설정인데? 비장애인으로만 바뀌는 설정이라고는 안 했는데?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또 실망했다.

『장애인복지법』 제2조(장애인의 정의 등) 제1항은 “‘장애인’이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를 말한다”라고 정의한다. 같은 조 제2항 제1호는 “‘신체적 장애’란 주요 외부 신체 기능의 장애, 내부기관의 장애 등을 말한다”고도 정한다. 이런 정의에 의할 때 매일 얼굴과 신체의 형태가 바뀌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워 은둔형 디자이너가 될 수밖에 없는 우진은 마땅히 ‘장애인’이다. 장애인 등록을 하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장애에 관한 영화다! 결국 남녀 주인공은 우진의 장애를 넘어서서 사랑을 이뤄내지 않는가. 그런데 ‘만성 무작위 신체변화 장애인’인 우진이 매일매일 변하는 모습에 다른 유형의 장애가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매일 얼굴이 변하는 장애라는 설정은 낭만적이지만 어느 날 눈을 뜨니 팔다리가 강직된 뇌성마비 장애인이 되는 설정은 아름답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하나의 영화를 콕 찍어서 파고들고 있긴 하지만, 사실 미디어가 장애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패럴림픽은 올림픽과 비교해 선수단의 규모는 절반이지만 뉴스 보도량은 10분의 1에 그친다.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의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인 김도현이 쓴 『장애학의 도전』(2019)은 책의 초입에서 이러한 미디어 속 장애인의 부재를 지적한다. 지난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참사가 촉발한 본격적인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이래 18년 동안 단 한 번도 3개 지상파 방송사 KBS, MBC, SBS의 <심야토론>, <100분 토론>, <시사토론>과 같은 대표 토론 프로그램에 장애 문제가 이슈로 등장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계산해 보면 어림잡아 2,000회가 넘는데도 그렇다. 책이 발행된 게 2019년 11월이다. 그 후로 설마 달라졌겠지 기대하며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 페이지를 뒤져보았다. 2019년 1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단 하나도 없었다. 장애는 주요한 뉴스거리도 토론 의제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길에서 보이고자 투쟁에 나선 장애인

‘비가시성’이라는 문제는 당사자가 목소리를 높이기 전까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달리 비가시성(非可視性)이겠는가. 미디어가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는 것은 현실의 장애인 비가시성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주류 사회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문제와 관련해 제도적으로 먼저 논의된 현안은 고용 문제다. 고용 현장에서 소외되어 존재가 지워진 장애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1990년 1월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 제정되었다. 법을 만들었다고 일터에서 심심치 않게 장애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노동 현장을 떠나 일상적인 우리의 생활을 좀 더 넓게 살펴보자. 오늘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타거나 흰 지팡이를 손에 쥔 장애인을 만난 독자가 몇 명이나 될까. 노동 현장에 가려면 일단 이동을 해야 한다. 비장애인들이 지겹도록 반복하는 평범한 출퇴근이 만약 매번 각오하고 겪어야만 하는 불편과 노력, 스트레스라면 어떨까? 현실에서의 장애인 비가시성 논의의 시작으로 반드시 ‘이동권’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평생을 변방의 존재로 머물다 죽음을 맞이한 장애해방열사 8인의 삶을 다룬 책 『유언의 만난 세계』(2021) 첫 글은 「1984년 서울, ’불구자‘의 유서」다. 1952년 태어난 김순석 열사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다. 다리를 절어도 걸을 수는 있었고 액세서리를 만드는 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80년 교통사고를 당한다. 휠체어를 타게 된 그는 1982년 퇴원해 사회로 돌아온다. 그러던 그가 불과 2년 사이에 크게 좌절해 세상을 등진 것이다. 2년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성껏 만든 물건을 들고 바깥에 나갔지만 멈춰 주는 택시가 없다. 버스와 지하철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다. 횡단보도는 누군가가 휠체어를 들어 올려 도로경계석 아래로 내려주기 전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다. 횡단보도 건너편 인도로 올라갈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좁은 남대문 시장 안에 들어서자 ‘가뜩이나 좁은 데 재수 없게 병신새끼가 휠체어까지 끌고 들어왔다’는 모욕을 당한다. 상인들은 그가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품 가격을 절반으로 후려친다. 이 중에서 가장 힘든 건 도로의 턱이다. 아무리 급해도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갈 수도 없고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다. 턱에 올라설 수 없어서 차도로 다니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어 파출소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분노가 쌓인 그는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에게 5장의 유서를 남기고 1984년 9월 1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떠난 후 3일 뒤 조선일보가 그의 사연을 뉴스화했다. 염보현 시장은 뉴스에 대한 응답으로 “장애자들의 통행 편의가 증진될 수 있도록 항구적이고 면밀한 대책을 수립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을까?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이순석 열사가 떠나고 38년이 지난 지금도 이동권 확보를 위한 투쟁 중이다. 물론 38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다행히 건널목 앞의 턱과 육교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2001년 장애인 노부부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던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의 휠체어용 수직형 리프트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른바 ‘오이도역 참사’다. 이를 계기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폭발한다. 2002년 발산역 참사와 2017년 신길역 참사는 경사형 휠체어 리프트에서 일어난 사망사고다. 장애인 이동권은 이렇게 목숨과 바꾸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버스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전국 저상버스 도입률은 28.4%에 불과하다.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겠다며 2021년 12월 개정했다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시내버스와 마을버스를 교체할 때는 의무적으로 저상버스를 도입하도록 했지만,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렇듯 교통약자인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이동권을 누리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비장애인인 아무개 씨가 의식적으로 장애인의 비가시성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은 단순히 시민의 출근길을 불편하게 만드는 ‘민폐 행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장애에 대한 패러다임은 ‘의료적인 모델’에서 ‘사회적인 모델’로 변화 중이다. 의료적 모델로 장애를 인식하면 장애는 의료적 손상 여부가 장애의 기준이 되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사회적 모델로 장애를 인식하면 장애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불편을 느끼는지가 기준이 되는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휠체어로도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면 걷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는 의미다. 미디어에서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현실에서 집 밖에 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길에서도 TV 속에서도 불편 없이 활동하는 그들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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