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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로드 투 카타르>

01. 007 작전보다 은밀한 소변 작전

by BOOKCAST 202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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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환자가 많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라 힘드시겠어요.”
“괜찮습니다. 휴가 때문이니까요.”
“이왕 가시는 휴가인데 푹 쉬다 오세요.”

간호사는 내가 쉬려고 휴가를 낸 것이라 알고 있으나,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밝힐 수 없는 비밀 일정이므로.

DCO는 축구 경기 일정에 따라 도핑 테스트를 위한 출장을 간다. 도핑은 AFC와 FIFA 주관 경기, A매치, 프로팀 경기 등 모든 경기에서 실시될 수 있는데, 매번 하진 않고 경기의 중요도를 고려해서 실시 여부가 결정된다. 갑작스러운 제보를 통해 테스트가 결정될 때도 있다. 출장지는 그야말로 전 세계다. DCO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의 도핑 테스트를 하는지는 비밀에 부치는 게 원칙이다. FIFA와 AFC는 출장 스케줄을 출발 2주 전쯤에 DCO에게 알려준다. 일정 통보가 워낙 급박하게 이뤄지니 흡사 기습 공격을 당하는 것 같다. 처음에 잘 몰랐을 땐 조금이라도 귀띔해 주면 안 되냐고 사정해 본 적도 있었는데 어림없었다. 직접 해보니까 윤영설 교수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걸 혼자 다하셨다는 게 참 놀라웠다.

가장 어려운 점은 병원 스케줄을 조율하는 것이다. 진료 일정에 타격을 줄 수 없어 1박 3일 일정으로 다녀온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거리가 먼 곳일수록 시간이 빠듯하다. 축구 경기는 대부분 주말에 진행된다. 토요일 아침 새벽에 인천에서 출국해 현지에 도착해서 도핑 테스트를 진행하고 그날 하룻밤 묵은 후, 일요일에 다시 테스트하고 출발해서 월요일 새벽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거다. 아무리 빡센 스케줄이라도 난 FIFA와 AFC로부터 콜이 오면 무조건 짐을 싼다. 일정 횟수 이상 도핑 업무를 거절하면 자격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도핑 테스트 일정의 비밀 유지가 중요한 이유는 만약 사전에 공지되면 그에 맞게 선수들이 대응할 수 있어서다. 도핑 테스트는 불시에 실시돼야 그 효과를 신뢰할 수 있다. 그래서 일정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다. 심지어 경기 당일까지 비밀에 부친다.

ⓒMarco Verch Professional Photographer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30478819@N08/51079824553
 

선수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도핑 테스트는 매우 중요하다. 도핑 의혹은 선수 당사자에게 가장 치명적일 뿐 아니라 해당 스포츠계 혹은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충격으로까지 확대되곤 한다.

2014년 러시아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자국 선수들의 소변을 바꿔치기하거나 도핑 분석 결과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러시아 정부와 정보기관까지 나서서 이뤄진 조직적인 불법 행위에 전 세계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WADA는 2020년 도쿄올림픽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 출전을 금지할 것을 결의했다. 출전이 금지되지 않는 선수들에 한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러시아 유니폼 착용 불가),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거나 국가를 연주하는 것이 금지된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러시아 축구선수들이 ‘전차 군단’ 스페인을 꺾고 8강에 진출했다. 러시아 선수들이 압도적인 체력을 보여주자 혹시 도핑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러나 FIFA가 러시아 선수들을 조사해 증거 불충분 결론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2018년 축구계가 떠들썩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슈피겔지는 풋볼리크스(Football Leaks), 유명 축구선수들의 이적료, 계약정보 등 선수와 구단, 축구계의 비밀을 폭로하는 웹사이트의 폭로를 인용해서 “레알 마드리드의 중앙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가 금지 약물 덱사메타손(Dexamethasone)을 복용했고, 과거 도핑 테스트를 거부한 전력이 있다.”고 보도했다. 2017년 챔피언스 리그 결정전을 앞두고 도핑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이때 라모스에게서 ‘덱사메타손’이 검출되었으며, 이 약물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팀닥터라는 것이다.

덱사메타손은 염증을 완화하고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합성 부신 피질호르몬제로, 스테로이드 성분 때문에 WADA가 금지 약물로 지정했다. 치료용으로 사전에 보고하는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 슈피겔지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레알 마드리드 구단 차원에서 선수에게 도핑을 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라모스는 레알 마드리드가 UCL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비롯해 수많은 우승을 거둘 수 있도록 한 주역이자, 현역 수비수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이다.

사건이 터지자 라모스는 절대 도핑을 하지 않았다며 완강히 부인했고, UEFA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천명했다. UEFA의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구단 팀닥터가 치료 목적으로 라모스의 어깨와 무릎에 덱사메타손 주사를 놓은 다음 보고서에 덱사메타손이 아닌 베타메타손(Betamethasone)을 투여했다고 잘못 기재했다는 것이다. 팀닥터가 이 같은 경위를 시인함에 따라 라모스의 도핑 의혹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2021년 UEFA는 AFC 아약스 암스테르담의 골키퍼 안드레 오나나에게 도핑 규정 위반으로 1년 출전 정지란 징계를 내렸다. 안드레오나나는 아약스의 주전이자 2018-2019 UCL에서 아약스가 4강까지 진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선수이다. 그는 몸이 좋지 않아서 아내가 준 약을 먹었는데, 그 약에는 금지 약물인 푸로세미드(Furosemide) 성분이 들어 있었다. 푸로세미드는 고혈압과 부종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 이뇨제로, 약물 복용 사실을 은폐하는 데 사용되어 금지 약물로 지정되었다.

그는 절대 도핑할 생각이 없었고 아내가 준 약의 포장이 아스피린과 비슷하여 착각했다고 해명했다. 오나나는 UEFA의 징계가 부당하다며 CAS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에 항소했는데, 그가 푸로세미드 성분을 복용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없다는 사실이 감안돼 최종적으로 9개월 징계로 종결되었다.

2021년 미국의 육상 스타 샤캐리 리처드슨은 선수 선발 직후에 시행된 도핑 검사에서 대마초마리화나 양성반응을 보였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듣고 슬픈 마음에 대마초를 사용했다며 투약 사실을 인정했다. 미국 USADA도핑방지위원회는 그에게 한 달간 선수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고, 단거리 경주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그의 도쿄올림픽 출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WADA는 (훈련 중을 제외하고) 경기 도중에는 대마초를 사용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피겨스케이팅선수 카밀라 발리예바의 도핑 사실이 적발돼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금지약물 트리메타지딘(Trimetazidine)에 양성 반응을 보였다. 트리메타지딘은 협심증을 치료하는 약물이지만, 심장에 들어가는 산소량이 증가돼 심폐기능이 향상되고 흥분 효과가 있어서 금지 약물로 지정되었다. 발리예바처럼 나이가 어리거나 젊은 사람이 복용할수록 효과가 크다. 고난이도의 점프를 구사하는 피겨선수에게 지치지 않은 경기력을 선물할 수 있지만 파킨슨병 유발과 떨림 등의 부작용 위험이 있으므로 절대 복용해서는 안 된다. 약을 복용하다가 중단하면 향상됐던 심폐기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결국 선수 생명이 끝나게 된다.

발리예바에게 검출된 트리메타지딘의 양은 1㎖당 2.1ng로, 다른 선수들 소변 샘플에 비해 무려 200배가량 많다. 심장병으로 이 약을 복용하는 할아버지와 컵을 같이 썼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검출될 수 없다. 게다가 트리메타지딘 외에도 하이폭센(Hypoxen)과 엘카르니틴(L-Carnitine)도 검출됐다. 이 두 약물은 금지약물은 아니지만 피로를 감소시키고 에너지와 지구력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 어린 선수의 몸에서 여러 가지 약물이 동시에 검출되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그렇다면 발리예바는 어떻게 이런 약물을 복용하게 된 것일까. 주변인들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DCO로서의 소견이다. 15세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그 약물의 성질을 이해하고 단계별로 복용량을 높이면서 섭취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자신을 믿고 따른 어린 선수를 도핑의 늪에 빠뜨린 사람이 누구인지 반드시 조사해 밝혀내야 할 것이다.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알려진 후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는 발리예바의 올림픽 출전 자격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다. 그러나 선수 측의 이의 제기로 자격 정지를 철회했고, CAS는 발리예바가 만 16세 이하의 보호선수라는 이유를 들어 IOC · WADA · ISU의 제소를 기각했다. 금지약물을 복용한 선수가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을 노리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조치에 김연아 선수를 비롯해서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도핑 선수가 경기에 출전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마리화나 복용으로 도쿄올림픽 출전이 금지된 리처드슨은 발리예바와 자신이 다른 게 뭐냐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여자 싱글쇼트에서 1위를 한 발리예바는 프리에서 세 차례나 엉덩방아를 찧는 등 평정심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여 최종 성적 4위에 그쳤다. 올림픽이 끝난 후 WADA가 발리예바를 지도한 사람들을 조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ISU국제빙상연맹은 3월 1일 발리예바를 비롯한 러시아 피겨 선수들과 벨라루스 선수들의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금지하는 징계안을 발표했다. 도핑과는 무관하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된 조치로서, 러시아는 카타르 월드컵 출전도 금지되었다.

발리예바 논란은 WADA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진행형이다. 그가 메달을 따지 못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사건으로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하는 전 세계 스포츠 선수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오직 메달이라는 목표를 위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경기력과 건강, 이 두 가지를 모두 얻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된다.

많은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길 희망한다. 이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도핑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러시아 사례처럼 능동적인 도핑이 아니더라도, 세르히오 라모스나 안드레 오나나처럼 건강 관리 혹은 치료 목적으로 약물을 사용했다가 도핑 위반으로 적발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어느 쪽이든 선수 개인을 비롯해 소속 구단 혹은 국가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선수들 스스로 자신이 복용하는 약물에 대해 체계적인 지식을 갖추고 엄격하게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토록 중요한 도핑 관리의 최전선에서 DCO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닌다. 스케줄은 007 작전처럼 은밀하고 전격적이다. 내가 제임스 본드 형님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게 유일한 옥에 티일 뿐.

DCO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사실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근사하진 않다. 실수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항상 초긴장 상태에서 경기장에 들어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핑 테스트는 선수의 혈액이나 소변을 받아서 분석하는 것인데, 검사 대상 선수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다. 선수들의 백넘버가 적힌 플라스틱 코인이 담긴 통에서 각 팀당 두 명의 코인을 무작위로 뽑는다. 도핑 검사 대상이 된 선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크루들에게 ‘붙잡혀’ 도핑룸으로 들어온다(크루들은 KFA가 경기가 열리는 지역에서 선발한 자원봉사자들로, 대학생이나 고등학생 축구팬이 절대다수이다. 경기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도핑의 투명성과 정확성을 위해 어느 곳에도 들를 수 없고, 도핑룸에 입장하면 도핑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소변 채취 방법은 일반적인 건강검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검진땐 대상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컵에 소변을 채취해와서 제출하면 되지만, 금지 약물 사용 여부를 검사하는 도핑 테스트에서는 소변 바꿔치기를 방지하기 위해 DCO가 선수의 몸에서 소변이 배출되는 걸 확인해야 한다. 선수가 하의를 완전히 내리고 서서 컵을 대고 소변을 받으면, DCO는 두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본다. 소변 채취 방법을 고려해서 선수와 같은 성별의 검사관(여자 선수에겐 여성 DCO, 남자 선수에겐 DCO)이 투입된다. 그렇다고 해도 선수와 DCO 모두 민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소변 채취가 끝나면 선수와 DCO는 굳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간다.

DCO와 선수 모두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소변이 나오지 않을때’이다. 선수가 90분간 벤치에서 대기했다면 큰 문제 없이 소변 채취를 할 수 있지만, 경기를 뛴 경우라면 체내 수분이 많지 않아서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도핑룸에 미리 생수를 박스째 가져다 두고 선수가 마시도록 하는데, 2~3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도핑검사가 끝나야 경기 운영팀 스태프들이 철수할 수 있으므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선수가 ‘잘 해내기를’ 기원한다.

채취된 선수들의 소변은 검사를 통해 금지약물의 검출 여부를 확인한다. 양성이면 약물이 검출된 것이고, 음성이면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양성이 나오면 추가로 검사를 실시하여 금지약물의 종류와 수치를 확인한다. 양성이 나왔다고 선수가 곧바로 징계받는 것은 아니다. 해당 약물을 치료 목적으로 사용했다면 선수는 메디컬 위원회에 그 같은 경위를 해명하고 면책을 요청할 수 있다. 해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위원회는 논의를 거쳐 징계 수위를 결정한다. 출전 금지는 최소 몇 개월에서 수 년까지 가능하며, 경우에 따라 영구 정지 처벌이 내려질 수 있다. (사실 도핑과 관련된 내용은 대외비에 해당하는 것이 많아서, FIFA에서 공개한 도핑 프로세스에 대한 내용 정도만 기술하였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어도 DCO로서 사명감과 보람을 안고 업무를 수행한다. DCO로서 일할 때 주의할 점은 병원 일정에 차질을 빚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 진료가 있으므로 휴가를 마음대로 내서는 안 된다. 휴가를 내려면 미리 진료 스케줄을 조정해서 환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요즘 ‘본캐’와 ‘부캐’라는 개념이 유행이다. 나에게 있어 ‘세브란스 병원 교수’는 본캐이고, ‘도핑 오피서 · 메디컬 오피서’는 부캐이다. 내 일상을 아는 이들은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어떻게 부캐까지 하느냐며 놀라기도 한다. 본캐와 부캐를 완벽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아빠, 남편, 가장 등 모든 역할을 다해내면서 부캐까지 감당하려면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부캐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부캐는 내가 숨을 쉬게 해주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이니까. 만약 축구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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